한줄 詩

산벚나무 연서 - 김영언

마루안 2019. 11. 23. 19:23

 

 

산벚나무 연서 - 김영언

 

 

너무,

겨울은 길었습니다

 

미처,

바라보지도 않았던 먼발치 능선

계절이 남기고 간 누더기 자락

꽤나 칙칙하게 덮여 있던 기억이

한껏 지루해질 대로 지루해질 무렵

 

문득,

점점이 찍힌 수채 물감처럼

연분홍 미소 헤프게 흘러내리길래

무작정 마음이 하얗게 흘려서

연둣빛 산길을 이끌고 그대에게 가는 길

 

드디어,

그대 무릎께에 이르러

숨차게 올려다본, 아

푸른 하늘 가득 복받쳐 오르는

무언의 빛살 조각들 눈부셨으나

 

그대,

첫 꽃은 너무 급해서

미처 마음에 따 담을 틈도 없이

봄비 한 번 제대로 적셔볼 틈도 없이

단 한 번의 도도한 破顔大笑 끝에

엷디엷은 색 서둘러 버리더이다

 

너무,

올봄은 짧았습니다

 

 

*시집, 집 없는 시대의 자화상, 작은숲출판사

 

 

 

 

 

 

단풍나무 아래 내려놓은 마음 - 김영언

 

 

단풍나무 아래 마음을 내려놓고

휘청거리며 떠나네

 

겨울이 오고

함박눈 속에 서서 외롭게 얼어갈 때

다가올 발자국 설령 없더라도

마음 녹지 않아 한 생애가 춥더라도

거짓말처럼 봄이 오고

지난 생이 녹아내리는 소리

벚나무 가지 끝에 피어 눈부실 수만 있다면

다음 생의 가을 다시 붉고 붉어서

그대 다가올 수만 있다면,

 

그대 발등에 언 마음을 내려놓고

빈 길 떠나려 하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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