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미친 척 - 한관식

마루안 2019. 11. 21. 18:45



미친 척 - 한관식



덜렁거리는 팔을 쥐고 응급실에 누웠다

순하게 생긴 간호사가 피범벅 된 옷을 가위로 잘랐다

가위는 몇 번 잰걸음을 하더니 마침내 속살을 보여줬다

살점과 피가 엉클어진 자리에 두 동강 난 팔과 손이 드러났다

간호사의 눈과 마주쳤다

나는 애써 웃었다 그녀의 눈엔 찡그렸을까

의사가 내 왼손을 확인했다 고개를 흔들었다

내게 전달되기까지 일초도 되지 않았지만 

이미 외팔이를 받아들였다 마치 오래전 준비해온 것처럼


왼손을 버린다는 동의서와 수술동의서에 사인한 나는

참으로 편안히 누워 수술실로 들어갔다

부분마취를 해서 정신은 명료했다

그라인더로 뼈를 깎고 이곳저곳을 헤집어 핏줄을 연결하고

바늘로 상처를 꿰맸다.

나는 놓치지 않고 지켜봤다 촉촉한 병원냄새가 참 좋다

그렇지만 박수를 포기해야만 했다


새로운 시나리오를 받아 쥐고 대사를 외웠다

이번엔 왼손 없는 장애인 역할을 맡았다

떨지 말아야해

당당해야 돼

대사를 씹거나 까먹으면 관객은 먼저 알아챈단 말이야


세 시간 수술 후 찾아온 식사 시간

배식하는 아줌마 앞에서

휑한 팔을 내보이며 

한 그릇으로 양이 차지 않아요 한 그릇 더 주세요

때로 살다보면

미친 척 할 때가 있다

그때가 지금이다 나는



*시집, 비껴가는 역에서, 도서출판 미루나무








장애 3급 - 한관식



하루 종일 툭툭 걷어차인 날

땅거미가 지면 쇠붙이를 찢는 차가운 비명이

절단된 왼손에 달라붙는다


2014년 1월 8일

왼손이 절단되었다


남은 한 손에 체중을 싣고 중심을 잃은 채

걸어간다. 불빛이 없는 통로를 통한다

그러면서 버텨야 한다고

그러면서 살아야 한다고


이 간절한 통로에서

바다를 찾아가는 낙오된 갈매기를 보았다

찾을 수 있을까 정녕 바다 위를 날 수 있을까

날갯짓을 하지만 쉽사리 통로를 벗어나지 못하는

갈매기처럼 나는 캄캄한 그대로다

바람도 앞서 지나갔다


두 손이 멀쩡할 때도 통로를 지난 적이 있다

한때 수은등이 켜진 이곳은 극히 낭만적이었다

낙오되지 않는 갈매기들이 서로를 호명하며 무리지어

바다를 향하던 모습이 선연한데

단지 왼손 하나에 어둠이 빼곡한가

뭉개져 버린 시간으로 박음질하여

그러다가 꿈이면 깨어나고

누더기처럼 기워서 왼 손 오른손 부딪히며

박수를 치리라

통로는 여전한데






# 황망간에 겪어야 했을 사고에 가슴이 서늘해진다. 어제 본 두 시간짜리 영화에서 수많은 죽음이 있었다. 칼에 죽고 총에 죽고 차에 치여 죽고 등, 그런 죽음도 내 주변에 생길 때 실감이 난다. 죽음과 사고 중 어느 것이 더 고통스러울까. 새옹지마, 전화위복, 인명재쳔 등 무엇으로도 위로가 되지 않을 때 시인은 시를 찾았다. 이 시를 읽으며 다시 운명이란 걸 믿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