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늙은 감나무가 말했다 - 이원규

마루안 2019. 11. 19. 19:47



늙은 감나무가 말했다 - 이원규



고향 하내리의 감나무를 찾아갔더니
네 청춘의 떫은 땡감들을 싹 다
누구에게 떠넘기고 왔냐며 호통을 쳤다


늙어가며 밑동 시커멓게 비우는 것은
행여나 유정란을 품기 위해서라고
내 고향 하내리의 늙은 감나무가 말하자


감나무 아래 검은 혓바닥을 내밀며
폐타이어가 물었다
네가 지나온 길 다 기억하냐고
설 때 서고 급가속 할 때마다
아스팔트 위에 찰거머리처럼 달라붙어
생살 생피의 지도 한 장 그려두었다고


다시 하내리의 늙은 감나무가 말했다
네 인생의 홍시들을 싹 다
어디에다 팔아먹고 반백으로 왔냐고
참깨밭에서 나보다 젊은 엄마가 벌떡 일어섰다



*시집, 달빛을 깨물다, 천년의시작








달빛을 깨물다 - 이원규



살다 보면 자근자근 달빛을 깨물고 싶은 날들이 있다


밤마다 어머니는 이빨 빠진 합죽이였다
양산골 도탄재 너머 지금은 문경석탄박물관
연개소문 촬영지가 된 은성광업소
육식 공룡의 화석 같은 폐석 더미에서
버린 탄을 훔치던 수절 삼오십 년의 어머니
마대 자루 한가득 괴탄을 짊어지고
날마다 도둑년이 되어 십 리 도탄재를 넘으며
얼마나 이를 악물었는지
청상의 어금니가 폐광 동바리처럼 무너졌다


하루 한 자루에 삼천 원
막내아들의 일 년 치 등록금이 되려면
대봉산 위로 떠오르는 저놈의 보름달을
남몰래 열두 번은 꼭꼭 씹어 삼켜야만 했다


봉창 아래 머리맡의 흰 사발
늦은 밤의 어머니가 틀니를 빼놓고
해소 천식의 곤한 잠에 빠지면
맑은 물속의 환한 틀니가 희푸른 달빛을 깨물고
어머니는 밤새 그 달빛을 되새김질하는
오물오물 이빨 빠진 합죽이가 되었다


어느새 나 또한 죽은 아버지 나이를 넘기며
씹을 만큼 다 씹은 뒤에
아니, 차마 마저 씹지 못하고
할 만큼 다 말한 뒤에 아니, 차마 다 못하고
그예 들어설 나의 틀니에 대해 생각하다
문득 어머니 틀니의 행방이 궁금해졌다
장례식 날 대체 어디로 사라진 것일까
털신이며 속옷이며 함께 불에 타다 말았을까
지금도 무덤 속 앙다문 입속에 있을까


누구는 죽은 이의 옷을 입고 사흘을 울었다는데
동짓달 열여드렛날 밤의 지리산
고향의 무덤을 향해 한 사발 녹차를 올리는
열한 번째 제삿날 밤이 되어서야 보았다
기우는 달의 한쪽을 꽉 깨물고 있는, 어머니의 틀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