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십일월 - 조유리

마루안 2019. 11. 12. 19:11



십일월 - 조유리



거기 절개지가 있다
쫙쫙 찢으며
하던 말 뚝뚝 끊으며
주소지 흐릿해진 얼굴들이 금이 가
갈라지기 시작한다


미간부터 단추를 푸는 동안
매일 있는 일처럼
손발톱은 아무렇지 않게 자라고
하오에 내다 널은 억새에서 바람이 태어나
끝물을 휘젓는다


쓸모 있는 것들이 듬성듬성해지고
어디론가 서두르는 이목구비


알아볼 수 있는 건
뒷걸음질 뒷걸음질로 접히는
나잇살뿐, 들고 내릴 수조차 없는


한 자루 뒤통수뿐



*시집, 흰 그늘 속 검은 잠, 시산맥사








흰 그늘 속, 검은 잠 - 조유리



한 삽 푹 퍼서 언덕 아래로 뿌리면 그대로 몸이 되고 피가 돌 것 같구나


목단 아래로 검은 흙더미 한 채 배달되었다
누군가는 퍼 나르고 누군가는 삽등으로 다지고


눈발들이 언 손 부비며 사람의 걸음걸이로 몰려온다
다시 겨울이군, 살았던 날 중
아무것도 더 뜯겨나갈 것 없던 파지(破紙)처럼
나를 집필하던 페이지마다 새하얗게 세어


먼 타지에 땔감으로 묶여 있는 나무처럼 뱃속이 차구나
타인들 문장 속에 사는 생의 표정을 이해하기 위해
내 뺨을 오해하고 후려쳤던 날들이


흑빛으로 얼어붙는구나
어디쯤인가, 여기는


사람이 살지 않는
감정으로 꽃들이 만발한데


죽어서도 곡(哭)이 되지 못한 눈바람이 검붉게 휘몰아치는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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