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의 얼굴이 전생처럼 - 김정경

마루안 2019. 11. 11. 19:28



나의 얼굴이 전생처럼 - 김정경



내가 모르는 사람처럼 지나갔다


울고 싶지 않아서 입속을 허밍으로 채운 날들
매달릴 곳이 차라리 사람이면 좋겠다
더 나이 들기 전에
내 집을 갖고 싶고
갈수록 병과 부음과 가까워 그날의 표정이 생겼어


맨정신으로 할 수 없던 말을
취하지 않고도 할 수 있게 됐다는 말
혼잣말에 놀라 두리번거리는 일 늘고 있지만
사람들은 놀랍도록 다른 사람 얘기를
귀담지 않는다는 걸 알아챌 무렵


이토록 서서히 멀어질 듯
사라질 듯 다가오는 것이라면
나의 사인은 희망이라고 기록해야 마땅해


아는 얼굴인데 이름이 생각나지 않는 이처럼


유리창마다
낯선 얼굴이 떠올랐다가 가라앉는다



*시집, 골목의 날씨, 천년의시작








낙타 - 김정경



둘이 오던 밥집에 혼자 찾아와
모처럼 걷기 좋은 날씨다, 하고 노인은 딴청 부린다


등을 둥글게 만들고 운동화 끈 고쳐 매주던 사람
생각에 발밑이 어둑하다


낙타 목에 방울 매달아 선수를 뒤따르게 한다는 사막 종주
쩔그렁쩔그렁 방울 소리
모래 씹으며 속도를 내게 된다고 했다
낙타가 앞지르면 실격이므로


신은 시간으로 위엄을 드러낸다지
깨진 무릎 호호 불어주던 입술에 입맞춤한 여름밤의 공원
복숭아 과즙처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던 머리카락 대신
숟가락 쥐고


뚝배기에 고개 박고 있는 노인의 그림자에는
구부정한
낙타 한 마리가






# 김정경 시인은 경남 하동 출생으로 원광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다. 2013년 전북일보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골목의 날씨>가 첫 시집이다. 현재 전주 MBC 라디오 작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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