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몇 겹의 사랑 - 정영

마루안 2019. 11. 12. 18:59



몇 겹의 사랑 - 정영



꼬리를 잘라내고 전진하는 도마뱀처럼
생은 툭툭 끊기며 간다
어떤 미련이 두려워 스스로 몸을 끊어내고
죽은 나를 돌아보지도 않고 스스럼이 없나


한 몸의 사랑이 떠나듯 나를 떠나 보내고
한 몸의 기억이 잊히듯 나를 지우고
한 내가 썩고 또 한 내가 문드러지는 동안
잘라낸 자리마다 파문 같은 골이 진다
이 흉터들은 영혼에 대한 몸의 조공일까


거을을 보면 몸을 바꾼 나는 나를 알아보지 못하고
무언가 잘려나간 자리만 가만가만 만져보는 것이다


심장이 꽃처럼 한 잎 한 잎 지는 것이라면
그런 것이면 이렇게 단단히 아프진 않을 텐데
몸을 갈아입으면 또 한 마음이 자라느라
저리는 곳이 많다


잘라내도 살아지는 생은 얼마나 진저리쳐지는지
수억 광년을 살다 터져버리는 별들은 모르지


흉터가 무늬가 되는 이 긴긴 시간 동안
난 또 어떤 사랑을 하려
어떤 벌을 받으려


몇 겹의 생을 빌려 입는 걸까



*시집, 화류, 문학과지성사








불어오는 바람을 가만히 품고 싶었으나 - 정영



한 그물에 꿰인
이 구슬이 나를 비추고 저 구슬이 비추고 나를 비춘 그 구슬이 또 저 구슬에 비치고 그 비친 구슬이 또 저 구슬에 비치고 세상 끝 모를 구슬들이 나를 비추니......*


이 우주의 소란에서 벗어날 길이 없다
세상의 가장 예쁜 물고기가 심해에서 울고
어쩔 수 없이 날개를 비벼야 하는 귀뚜라미가 울고
인간이 있어 외로운 개들이 울고
폭풍우 몰려드는 들판이 저토록 운다


무주(無住)의 밤기차는 눈발 속에서도 달리고
허공에서 숨을 놓는 바람도 나를 버려두고 가니
나는 어떤 죽음이어야 좋다고 껴안을까



*인드라망: 화엄경에 나오는 이야기로 삼라만상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어 있다는 것을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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