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홀로 반가사유상 - 권상진

마루안 2019. 11. 12. 18:49



홀로 반가사유상 - 권상진



얼굴과 손등에 보풀보풀 녹이 일었다

눈물은 날 때마다 눈 가 주름에 모두 숨겼는데도

마음이 습한 날은 녹물이 꽃문양으로 번지기도 하였다

오래도록 손때가 타지 않은 저 불상의 응시는 일주문 밖

종일 방문턱을 넘어 오지 않는 기척을 기다리느라

댓돌에 신발 한 켤레는 저물도록 가지런하다


낡은 얼레처럼 숭숭한 품에서는 

시간이 연줄보다 빠르게 풀려나갔다

두어 자국 무릎걸음으로 닿을 거리에

아슬하게 세상이 매달려있는 유선전화 한 대

간혹 수화기를 들어 팽팽하게 세상을 당겨 보지만

떠나간 것들은 쉬이 다시 감기지 않는다


몇 날 열린 녹슨 철 대문 틈으로

아침볕은 마당만 더듬다가 돌아서고

점심엔 바람이 한 번 궁금한 듯 다녀가고

달만 저 혼자 차고 기우는 밤은

꽃잎에 달빛 앉는 소리도 들리겠다


누워서 하는 참선은 하도 오래여서

반듯이 의자에 앉는다

오늘은 강아지 보살 고양이 보살도 하나 찾지 않아서

한 쪽 다리는 저려서 들어 포개고

한 손은 눈물을 훔치러 가는 중이다



*시집, 눈물 이후, 시산맥사








페이드 아웃 - 권상진



경도와 위도가 모호해진 생의 어느 지점에서

되도록 아주 느리게 그는

한 방울씩 사라져 가고 있다

수액이 떨어지는 속도만큼 말갛게 변해가는 기억

어떤 각도에서도 더 이상, 세상은

선명하게 수신되지 않는다


무대 위로 방백의 대사들을 푸념처럼 흘리는

슬픔이 간간이 등장할 때마다

괄호 속 지문들은 순간 혼란스럽다

가슴께를 흔들어 대사를 재촉하는 손바닥에

끊일 듯 이어지는 심장의 끝없는 말줄임표

대본에 없는 그를 찬찬히 읽어가던 슬픔이

감았던 눈을 뜨며 문을 나선다


이 배역은 여기서 끝을 내고 싶다

결말만 남은 몇 페이지 대본을 뒤적여

예언을 찾듯 다가올 시간을 묵독해 본다

막차처럼 기억의 정거장마다 멈춰서 떠난 것들을 기다리다가

끝내 돌아오지 않는 것들은 그냥 두고

주섬주섬 남은 기억들만 챙겨 떠나는 가설무대

지워지는 빛의 입자들 뒤로 옴니버스 삶의 막이 내린다


실감 나는 배역이었다






# 언젠가부터 연륜이란 걸 믿지 않는다. 나이란 먹을수록 겸손해지는 것이 아니라 땟국물처럼 쌓일 뿐이다. 이 시를 읽으며 아름답게 늙는 것이란 없음을 느낀다. 그러나 늙는 운명이 정해진 것이라면 쓸쓸함을 삶의 배경으로 삼는 것도 괜찮은 방식이다. 나는 점점 더러워지는 중년, 지나온 불혹이 아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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