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햇빛으로 긁었다 - 손현숙

마루안 2019. 11. 15. 19:31



햇빛으로 긁었다 - 손현숙



구닥다리 당신은 한물간 애인이다
손끝으로 풀었다 장전하고 다시 되감는
동그란 통 속의 돌돌 말린 백지
한때는 몸속 깊이 품고 다녔다
잊을 만하면 치받곤 하던 위통 같은 것
실금을 긋듯 온몸에 햇빛 상처를 내는 것으로
너는 침묵을 깨곤 했다
애인의 손톱으로 긁어 만든 음화는
암실에서만 피는 꽃,
비밀은 암등 아래서 천천히 해독되었겠지만
이스트만 코닥사에서 더 이상
필름을 제작하지 않는다는 소문,
내 유적 같은 저 애물단지를 내다 버려야지
가슴을 열어서 감고 풀고 지지고 볶을 것도 없이
손가락 하나 까딱 하면
젊은 애인이 서슴없이 몸을 연다
날카롭게 긁힌 등을 쓸어주어도
도무지 치받치고 긇혔던 여백이 없어
더 이상 만질 수도 없는
당신의 마음 안다, 이별이다



*시집, 일부의 사생활, 문학의전당








신은 아홉 벌의 옷을 껴입었다 - 손현숙



부재중 찍힌 전화가 아홉 번
연락을 할까, 말까 망설인다
아홉은 내가 아는 완전수
그녀는 아홉 벌의 옷을 껴입고 다섯 번의 봄을
백골로 살았다 부산진구 초읍동의 한 빈민가
쪽방에서 겨울을 넘기기 위해
방 안에서도 목장갑을 끼었다 아무것도 찾지 않는
집, 손수 보일러도 끄고, 전등불도 끄고
혹한이 들어오실까, 구멍이란 구멍은 죄다 틀어막고
문이란 문은 죄다 닫아걸었다
무덤처럼 동그란 공간 속이 따뜻해라,
아홉 벌의 옷이 일으키는 정전기처럼
수돗물 똑, 떨어지는 소리에
몸이 조금 움직였으려나 먼지처럼 소리가 일어서는
집, 이 방 저 방 기웃거리면서
백골이 될 때까지 살았다
머리 가르마처럼 반듯하게 누워서
옷 벗겨줄 사람 없어
아니다, 아홉 겹의 옷을 벗기려면
너무 수고롭겠다, 제 몸을 제가 염했다
처음부터 내 것이 아니었던 듯
저에게 저를 송두리째 버렸다
'잘 있었어?' 아홉 벌의 옷을 벗겨내자
'잘 있어요' 최후로 달싹, 거리는 백골의 입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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