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등 뒤의 시간 - 박일환 시집

마루안 2019. 11. 8. 19:48

 

 

 

요즘 시집을 내는 출판사 중에 괜찮은 시집이 몇 있다. 시인들이 덩치 큰 전문출판사에서 시집 내는 것을 대단한 훈장으로 생각한다는데 과연 그에 걸맞은 좋은 시가 댬겼는지 의문스럽다.

친분과 인맥으로 엮인 평론가들의 찬사를 등에 업고 메이저 출판사에서 쏟아지는 시집 중에 마음을 움직이는 시집 만나는 일은 별로 없다. 시 읽는 내 수준이 낮은 것도 있지만 워낙 청개구리 아웃사이더 체질이라 더 그럴 것이다.

시집 코너에 가면 구석진 자리에 꽂힌 시집에 먼저 눈길이 간다. 반걸음에서 나온 시집이 몇 권 있다. 신생 출판사로 내가 알기론 삶창에서 떨어져 나온 출판사인 모양이다. 나는 반걸음보다 삶창이란 단어가 더 좋다.

문동만 시집이 첫 주자였는데 나름 좋은 시가 많았다. 이번엔 박일환 시집이 확 끌어당긴다. 시집을 많이 낸 시인은 아니나 학교에서 아이들을 가르친 교육자였다. 편한 길 두고 가시밭길도 걸었고 참교육을 위한 신념도 탄탄한 사람이다.

대부분의 책이 그렇지만 이 시집을 읽으면 그 사람의 심성과 교양이 보인다. 가방끈에서 나오는 교양이 아닌 그 사람이 살아온 길에서 체득된 교양이다. 이런 분을 스승으로 둔 학생은 얼마나 행복할까. 내게도 이런 분이 있었다면 하는 생각도 한다.

이 분이 칠판 앞에 서면 나는 맨 앞자리에 앉겠다. 나도 학창 시절 시인과 비슷한 국어 선생과 역사 선생님이 계셨다. 지금도 늘 가슴에 담고 있는 스승이다. 그때는 몰랐는데 내게 세상 보는 방향을 설정해준 분들이다.

시인은 능소화에 대한 시를 써 보리라 생각했던가 보다. 전교조가 법외노조 판결을 받던 날 시인은 비로소 능소화에 대한 시를 쓴다. 나도 능소화에 관한 시를 여럿 읽었지만 이 시집에 실린 능소화는 가히 혁명적이다.

 

사람은 그 사람이 걸어온 길을 보면 알 수 있다. 시인도 마찬가지다. 능소화를 보고 절절한 서정이 바탕에 깔린 송곳 같은 각성을 하게 하는 싯구에다 서사성까지 겸비한 문장을 써내는 것도 시인의 혁명적 사고에서 나온다.

 

*그날 오후에 능소화는 사뭇 관능적인 자태를 뽐냈으며 나는 전교조가 법 밖으로 밀려난 사실을 머리에서 밀어 내고 다만 관능적인 혁명과 혁명적인 관능에 대한 생각을 궁글렸다

 

나는 이제 이렇게 말하겠다 혁명은 서로를 눈 멀게 하는 것이라고 맹목이 없으면 사랑이 아니듯, 관능이 없으면 매혹도 없을 테니 주황빛 능소화의 관능이 혁명의 도화선이 되지 말란 법도 없을 터!
난데없는 믿음이 또렷해지기도 하는 것이었다  

 

*시 <능소화>에서 윗 부분 생략하고 부분 발췌

 

시집에는 여러 번 읽고 싶은 주옥 같은 시들이 많지만 이 시 하나 만으로도 시집 값은 충분하다. 시인은 얼마전 오랜 기간의 교직 생활에서 퇴직했다. 삶은 투쟁적이었어도 곱게 늙은 중년의 전형이다. 민들레는 지독한 환경에서 살아 남아 꽃을 피우고 홑씨를 바람에 날려 퍼뜨린다. 이 시집도 민들레 홑씨처럼 널리 퍼져 읽혔으면 하는 바램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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