네줄 冊

비껴가는 역에서 - 한관식 시집

마루안 2019. 11. 2. 19:55

 

 

 

예전부터 부산을 해마다 두 번씩 가자고 다짐했었다. 잘 지켜지지 않지만 지난 구월에 부산을 갔다. 2박 3일 동안 원도심을 산책하듯 걸었다. 초량동에서 수정동, 좌천동, 범일동까지 원도심 골목을 종일 걸었다. 나는 서민들의 애환이 담긴 오래된 풍경이 좋다. 

이튿날은 동광동, 광복동, 남포동 등을 거쳐 영도다리 지나 영도까지 걸었다. 부산의 구도심은 걷기에 참 좋은 곳이다. 배 고프면 허름한 식당에 들어가 요기를 하고 다리도 쉴 겸 창이 넓은 커피집에 들어가 바깥 거리를 한참 바라보기도 했다.

부산을 걷는 중 보수동 헌책방을 갔다. 부산을 갈 때마다 무슨 성지마냥 들르는 곳이다. 딱히 무슨 책을 구하겠다는 생각보다 그냥 습관처럼 가는 곳이다. 그곳에서 이 시집을 만났다. 구입한 몇 권의 시집 중에 두 권이 한관식 시인이다.

집에 돌아와서도 여기저기 싸돌아 다니느라 한동안 펼칠 기회가 없었다. 가을이 익을대로 익은 요즘 별 기대 없이 읽었는데 술술 읽히는 시가 눈에 착 달라 붙는다. 보수동에서 사온 시집 여섯 권 중에 유이하게 가슴에 들어오는 시집이다.

두 권 다 독서 후기를 남기고 싶으나 시인의 첫 시집인 <비껴가는 역에서>로 정했다. 새것 좋아하는 세태를 봐서는 최근에 나온 <밖은 솔깃한 오후더라>가 낫고 좋은 시도 많이 실렸으나 시인의 열정이 담긴 첫 시집에 더 눈길이 갔다. 

시인의 정체성이나 작품의 문학적 완성도 등을 논하는 건 내 실력으로 언감생심이니 넘어간다. 그런 문학적 비평은 고매하신 평론가들 몫이다. 나는 시인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공감하고 독자 입장에서 좋은 시를 알아 보고 내 몫을 챙기면 그만이다.

그리고 좋은 시가 기억에서 잊혀지는 것이 아쉬워 없는 시간 쪼개 이곳에 한 자 한 자 남기는 것이다. 일일이 펜으로 쓰지 않고 자판 두드리면 되는 좋은 세상 만난 덕에 옮겨 적는 수고는 많이 덜었다. 글씨도 쓰는 것과 두드리는 것이 정성의 차이는 있지만 시에 공감하는 것은 매한가지다.

시집에는 몇 년 전 사고로 왼팔을 잘라 낸 시인의 아픔과 그 운명을 담담하게 수긍하는 시로 가득하다. 아무리 순탄한 인생을 산 사람도 인생의 굴곡은 있기 마련인데 시인은 이 사고로 엄청난 인생의 전환점을 맞는다. 아픔 뒤에 찾은 낙천적 긍정이다.

정해진 운명이 어디 있겠는가마는 시인은 사고로 큰 것을 잃고 더 큰 것을 얻는다. 마치 신이 내린 무당처럼 가슴에 숨어 있던 시가 줄줄이 쏟아진다. 그것도 아주 빼어난 시다. 작두만 잘 탄다고 용한 무당 아니듯 시도 시 나름 아니겠는가.

유명 출판사도, 시집 전문 출판사도 아닌 지방의 무명 출판사에서 나왔다. 요즘 기초가 부실한 무허가 시인이 난무하는 시대에 이런 시를 읽게 된 것은 행운이다. 한동안 이 시집에서 고른 시 옮기는 즐거움은 이어질 듯하다. 그리고 낭중지추, 이제 시인이 알려질 차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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