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눈먼 사내 - 김태형

마루안 2019. 11. 7. 21:37



눈먼 사내 - 김태형



사람의 손이 더 크게 느껴질 때가 있지
태어날 때부터 앞을 보지 못한 사람은 그렇다는군
손으로 만졌을 때
세상이 모두 다 크게 느껴지는 건 아닐 텐데
상대의 손만큼은 유독 크게 느껴진다지
발갛게 불을 켠 등처럼
온기를 품은 것들도
더 크게 느껴진다는군
어쩌면 그이는 따뜻한 손을 잡았을 거야
그런 기억은 오래 가겠지
다른 것보다 더 크고 환하니까 따뜻하니까
네 손등을 스쳤을 뿐이지만 나도 그래
눈이 멀었던 거지
손밖에 기억이 나질 않아
새하얗게 볕살이 내려앉은 그 손밖에



*시집, 고백이라는 장르, 장롱








이모 - 김태형



소아마비를 앓았던 게 다섯 살이었잖아
그 전에 두 발로 걸어본 기억이 없어
그래서 목발로 걷는 게
불편하지가 않아
두 발로 걸어본 기억이 있었다면 난 불행했을까
몇 해 전에 사고로 두 발을 잃은 친구가 있어
창문이 저렇게 높았었냐고
구름을 기다리며 사는 게 이젠 싫다고
그런데도 휠체어를 타는 걸 몹시 두려워해
두 발을 가진 기억 때문에 괴로워하는 것 같아서
이렇게 말해줬지
누구 두 발 없이 길을 갈 수 있겠니
넌 참 행복한 거야
그러고 나니까 이상하기도 하지
나도 두 발로 걷던 기억이 나는 거야
발가락 사이로 구름이 밟히면서 간질거리지 뭐야
두 발로 걸어봤다는 걸
영영 모르고 살다 죽을 뻔했잖아
난 어쩌면 그 기억을
스스로 지워버리고 살아왔는지도 몰라
둘이서 얼마나 울다가 웃다가 그랬는지
그렇게 참 행복해지더라 살아온 게 다 고맙더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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