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정오의 종소리 - 안태현

마루안 2019. 11. 6. 22:20



정오의 종소리 - 안태현



정오의 종소리가 들렸다
나는 그 너머를 알지 못해서 허공을 두드렸다
여러해살이풀처럼 허기가 목을 감고 알 수 없는 높이에 긴 팔을 뻗고 있었다


그곳은 나의 어떠한 범주에도 속하지 않는 곳 밥 먹으러 가자고 끌만한 사람이 살지 않는다
멀다
아주 멀어서
내 목소리와 눈빛이 닿지 않는다


밀물져오는 종소리를 들으면 참깨 꽃이 벌어지던 언덕의 성당이 떠오른다 누구일까 궁금하던
평생의 반려자가
저 길을 걸어오리라 예견하기도 했었는데


나의 알 수 없는 삶이
미래의 유물이 아니란 걸 깨닫게 된 후
나를 관통하는 것들이 많아졌다 살고 있다는 느낌과 쓸모없는 슬픔 같은 것들
그러나 비울 수 없는 것들


녹슨 방패 같은 태양이 비스듬히 걸린 종탑에
까마귀 한 무리가
소란스런 날개를 펴고 점점 내려앉는다


화관을 쓴 관을 밀고 가듯이
종소리가 마을 한 바퀴를 돌아 정오에서 자정으로 돌아가고 있다



*시집, 저녁 무렵에 모자 달래기, 시로여는세상








늦은 인사 - 안태현



천변에 노랑꽃이 피었다


박수가 없는 11월에 꽃은 왜 정장을 입고 나오나


몇 번인가 침수의 흔적이 있는 너는
조금 힘겨워 보인다
흐린 물살이
안감에서 노랑을 조금씩 닦아내고 있는 것 같다


간신히 얻은 노랑 한 줌을 쥐고 있으면
꽃의 말을 배우고 싶어진다


이제는 낙서에서 찾아볼 수 없는 다정한 말들을 하나씩 불러보고 싶은


꽃과 나의 근친의 세계


나 때문에 아팠을 사람이 있을 거라고 꽃 한 송이 얹어 말해주는 이가 있을 것 같은데
손바닥을 펴면
흩어진 노랑을 따라 아이도 가고 노인도 간다


아무도 가본 적 없는
캄캄한 내일 저녁엔
누가 생의 한복판에서 늦은 인사를 던질 것인가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만추 - 정성환  (0) 2019.11.07
나는 원래 두 사람이었다 - 김준현  (0) 2019.11.07
희미한 전언 - 김시종  (0) 2019.11.06
어쩌라고, 이 가을 - 오광수  (0) 2019.11.03
마법의 시간 - 최영미  (0) 2019.11.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