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우리들의 서정 - 김안

마루안 2019. 11. 8. 19:02



우리들의 서정 - 김안



세상의 모든 집들마다

감람나무가 심겨져 있으니 우리에겐 진리가 불필요할지도

비유를 버리고 선언을 버리고 신념과 엄살

마저 버리고 예언하듯

당신은 자정 넘은 시각 구로역 지붕 아래에 서서

애인을 버리다가 부둥켜안다가

눈발을 맞다가 진창이 되다가 부끄러움이 되다가 비밀이 되다가 돌아오지

않다가 그러니 우리에겐 공동체가 불필요할지도

사소한 우리에겐,

영원히 난해할 것처럼 사사로운 우리에겐 드잡이할

당신만이 필요할지도

인간이란 단어와 사람이란 단어의 간극처럼

눈발이 진창이 되어 딸아이의 새 신발을 더럽히는 것처럼

전향과 변절처럼

옛 애인이 가고 싶어 했던 파타고니아와 눈 퍼붓는 낡은 구로역처럼

우리가 악과 사랑으로 나뒹굴던 날들이

젖과 꿀이 되어 감람나무에 스미더라도 우린 그저

샅과 샅으로 이어진

사사로운 오역의 터널에 불과할지도

진리와 사랑이라 믿어왔던

멜랑콜리한 오역과 비문에 혹란하며 우리는 우리란

진창이 될지도

나무 위에는 죽어버린 악기들의 무덤처럼 둥글게 눈이 쌓이고

또다시 해가 뜨면 젖은 발 꽝꽝 얼어 땅에 박히고

사소한 것만이 영원한 관습이 되듯

창고에 적재되어 있다가 한데 불태워지는

단 한 번도 울려본 적 없던 악기들의 마음처럼

이토록 사사로운

마음의 잿가루만 폴폴 날리는



*시집, 아무는 밤, 민음사








십일월 - 김안



우리는 차가운 성분으로 만들어진 탓에,

아마도 신이 그러했듯,

이 차가운 형상과 불꽃을

살처럼 연한 말들로 덮은 채

나뭇잎이 피에 젖어 무겁게 떨어지길 기다린다.

그리고 우리는 말하여 호흡할 테다.

호흡으로 살찔 테다.

불편한 잠, 늙어 가는 바람, 반복되는 노동, 늘 확고했던 선언들과 아노미.

우리는 우리와 똑같은 얼골을 한 시듦이

목 잘리기 전에, 운다.

울면 우리의 말이 단단한 물이 되어 난반사.

이는 우리의 말과 살이 아득해지리라는 기미,

우리가 곧 사라지리라는--






# 김안 시인은 1977년 서울 출생으로 인하대 한국어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4년 <현대시>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오빠생각>, <미제레레>, <아무는 밤>이 있다. 김구용시문학상, 현대시작품상 등을 수상했다. 김안은 필명이고 본 이름은 김명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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