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늦가을, 환치되지 않는 - 이성목

마루안 2019. 11. 8. 19:12



늦가을, 환치되지 않는 - 이성목



버린 꽃을 주워들고
킁킁 냄새를 맡다가 다시 내팽개친다


이별은 짧고도 강렬한 구두 뒤꿈치 같은 것


낭자한 꽃잎
아직은 벙글지 않아 알아볼 수도 없는 말들이
배부터 짓뭉개진다


저걸 개라고 할까
털이 많은 저걸 밤이라고 할까


길바닥에 넥타이를 질질 끌고 다니는
그림자도 한때는
말쑥하고 다정한 그림자


오줌을 참느라 얼굴이 빨개진
꽃잎 한 장
골목 안으로 굴러간다


킁킁거리며 따라가는
가랑이 사이에 덜렁거리는
저건 벌써
무엇을 질질 싸대는지


고백이 이별이 되는 건
개 같은 일이지만


얼굴이 빨개지도록 팔랑거리던
나뭇잎 한 장이 가장 먼 허공으로


몸을 던진다



*시집, 함박눈이라는 슬픔, 달아실출판사








백 년 전 - 이성목



나는 사람이 아니었습니다


오늘이라는 말에는 얼마나 많은 내일이 숨어 있는지
몸안에서 비둘기를 꺼내다가 실패하였습니다
장미도 리본도 손수건도 꺼내는 데 모두 실패하여


나는 아직 내가 아니었습니다
생각만으로는 내가 될 수 없었습니다


생각에는 언제부터 눈동자가 그려져 있었나요
생각이라고 하니 자꾸 눈을 뒤집게 되네요
눈동자의 뒤편이 생각인가요


뿌옇게 흐리고 붉은 핏줄이 거미줄처럼 얽힌
새의 알에서도 보았던 불거진 핏줄의 생생함
생각해 보니 나는
생각의 알에서 깨어난 난생설화의 주인공이었던 것도 같습니다


그런데 몸안의 비둘기 왜 꺼낼 수 없었을까요


나는 사람이 아니어서
그 많다는 내일은 생각조차 할 수 없습니다


하루는 몸안에서 늑대를 꺼내 울부짖고
또 하루는 개를 꺼내 뒷다리를 들고 오줌을 갈겼습니다


그런 날이면 악몽에 시달리곤 하였습니다
몸안에 물컹한 무엇이 잡혀 꺼냈을 땐
사람의 얼굴이었습니다
다음 날은 그 악몽을 가시덤불 깊숙하게 숨겨두며
다시는 꿈에라도 오지 말라고 이름 모를 신에게 빌고 빌었습니다


나는 손의 재능을 과신한 마술사였던 걸까요


번번이 몸안에서 장미를 꺼내려다 실패하고
새를 꺼내려다 실패하는


백 년 전, 오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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