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만추 - 정성환

마루안 2019. 11. 7. 19:52



만추 - 정성환



아침이 밝았는데도
달은 뜬눈으로 서 있다


다시 젊어진 아침 물고 와 푸른빛 토해내고
사라질 달빛 같은 나이, 중년이라는 것이
더는 물러설 곳 없어
물색 고운 낮에도 몽유하듯 떠돈다


발목 깊숙이 빠져드는 모래밭에
쭈그리고 앉아 신발을 털어내도
쉬이 떨어지지 않는 무모한 미련들
알알이 박혔으니


아직 오지 않은 내 마지막 뒷모습까지 버리면
스스로 너에게 깊어지는 가을
늦도록 울겠네



*시집, 당신이라는 이름의 꽃말, 문학의전당








낙엽 - 정성환



굳이 숫자로 센다면
아마도 얼마간의 푼돈 같은 세월이었을 텐데
너 만나 봄 쑥처럼 부풀었고
장맛비마냥 울음 달고
그냥저냥 살아왔다


떨어지면 까마득한 전생이고
깨어나면 억겁의 모를 일이다


허리 한번 펴보지 못한
늙은 모친 밭고랑 주름처럼
꼬깃꼬깃하게 파종한 과거 훑다 보면
그래도 나는 사랑했구나, 하고
안도한다


너와 내가 물들어서
가을이 제대로 불타는 것이지
칭칭 바람만 감아 안고
응어리로 남겨진다면
어디에도 우리는 깃들지 못하지


한번 떠나온 길 돌아갈 수 없어
아, 가을은 내 나이만큼 거침이 없구나
들판에서 뜨거운 기도 털어내고
승천 기다리면 조용히 겨울이다
세상에서 스치지 않는 것은 없다


가을이 허기지는 이유다






# 돌아 보면 아쉬움만 묻어나는 중년의 회한을 이토록 절절히 표현한 시가 있을까. 빙빙 돌리지 않고 현란한 비유와 장식 없이도 가슴 저리게 하는 시다. 가을이 허기지는 것은 진즉 알았으나 좋은 시의 허기짐에 이렇게 사무치는 것 또한 가을이기 때문이다. 아! 나는 언제쯤 이렇게 좋은 시를 다 읽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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