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나는 원래 두 사람이었다 - 김준현

마루안 2019. 11. 7. 19:38



나는 원래 두 사람이었다 - 김준현



우산은 갈증을 앓고 있다, 인간의 수만큼 많은 빗방울들이
질긴 몸으로 떨어지는데
그림자에 물을 주면 그림자가 자라니?
굴속보다 글속이 더 어두워서 나는 흐린 날에만 겨우
존재하고 있다


아름다움을 위해
신은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 있다, 없다고 꽃잎이 다 뜯긴 꽃
꽃이 죽을 때까지 나는 자학과 피학을 오가며
살았다, 희박하게라도


말해 준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목이 늘어난 티셔츠의 자연사와
나비의 몸무게가 없다는 사실
나방과 모방과 해방을 모르는 가로등처럼


때로 내가 넘쳐흐른 적이 있다



*시집, 흰 글씨로 쓰는 것, 민음사








연옥의 시 - 김준현
- 빅 브라더의 시대가 끝나고



전화가 울릴 때 전화를 울리는 감정을 느낄 때


배를 누를 때만 혼잣말을 하는 인형처럼 나 혼자 침묵하자
석양은 피멍이 든 무릎으로
지평선에 꿇어앉은 거인의 것,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는 비밀들을


1인분의 감정을 쏟아 내자
수백만의 황소들이 시체를 남겨 놓은 것 같은 사막의 가운데
갈비뼈가 갈비뼈를 밀어내는 움직임으로


네가 없어도
면도날에 낀 수염처럼 마치 그곳에서 나고 자란 것처럼
사춘기를 맞았다


죽은 봄의 기록은
새가 죽어 갈수록 새장이 현악기를 닮아 가는 비참함
내가 든 꽃병을 내가 엎지르는 쓸쓸함
귤 대신 귤껍질이 늙어야 하는 비유
눈으로 숨 쉬는 해골의 호흡법
변하지 않을 노랑의 성격과 배가 맞은 노랑
끝에 있는 태양의 끝을
지나는 것들을


있는 힘을 다해서 없어진 창문을


두드리자, 통기타를 고요한 낙타의 등짝처럼 두드리자
몇 사람의 무어인들이
호우호우, 소리를 지를 때까지
미운 정만 든 의자들이 의자와 다른 자세가 될 때까지
걸음을 잊은 그대여


어둠을 일곱 번 접으면 밤이 되고 어둠을 열 번 접으면 불법이니
어둠을 있는 대로 구기면 내가 될 것이다


뜨거워진 나방들이 아침마다 몸을 내려놓고 태양 속으로 숨는 것처럼


죽을힘을 다해 죽는 것과
온 힘을 다해 사는 것이
다르지 않은 것처럼 몸을 뒤척이자






# 김준현 시인은 1987년 경북 포항 출생으로 영남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2013년 서울신문 신춘문예로 등단했다. <흰 글씨로 쓰는 것>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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