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희미한 전언 - 김시종

마루안 2019. 11. 6. 21:43



희미한 전언 - 김시종



손을 쬐면

빛이 술술 떨어져온다.

빛바랜 달력

입자처럼.


이렇게도 맑은 햇빛 속에서는

누구든 묵묵히 있을 수밖에 없다.

헤매면서도 갈 것은 간다고

스스로 자신을 타이를밖에.


벌거벗은 나무 끄트머리

감이 하나 빨갛게 선명하다.

모든 것이 바뀌어도

해마다 누군가 또 같은 광경을 본다.


그것이 얼마나 높은 외침인지

사람의 귀에는 와닿지 않는다.

석양에 물들고 종소리에 스며들어

푯돌을 울릴 뿐이다.


잘려나간 노을만이

원풍경(原風景)을 남기는 거리에서

양손으로 감싸

한줄기 고동을 가슴에 전한다.



*시집, 잃어버린 계절, 창비








녹스는 풍경 - 김시종



어디를 어떻게 헤매었는지

거의 남지 않은 산감(山枾)

붉은 과실 밑에

소라 껍데기 하나

위를 보며 구르고 있다

하늘 끝 추위에 떨고 있는

붉은 외침과

찢긴 하늘을 마냥 우러르고 있는

헛된 외침이

열리지 않는 나무꾼

녹슨 지도리 한쪽에서

멈춘 시간을 견디고 있다


감도 곧 떨어져

스스로 시간의 출구가 되겠지

거기서 메말라가는 것이

거기서 그대로 메마르게 한 시간을 부수고 있겠지

시간이 흐른다는 것은

자전(自轉)에 동일화하려는 자의 착각

묵묵히 있는 것의 깊은 바닥에서

더없이 많은 시간을 시간이 가라앉히고 있다


매번 똑같이 매번 그 위치에서

햇빛은 기울며 찬장을 범하고

삶은 단란함의

부드러움 가운데

옷장 안을 습하게 한다

빌딩의 난반사나

생명보험 통장보다

시간은 여기에서 좀더 짙게

나날을 바림질하며 묵묵히 있다


나의 시간도 아마

타고 넘어온 어딘가

그늘에서 입을 크게 벌리고 있었으리라

거기에는 아직 사물에 익숙해지지 못한 시간

그 풋풋한 모습이 있었을 터이다

순간 개똥지빠귀 한마리

점이 되어 사라지고

이제야 수직으로

지금껏 누구 한 사람도 들은 일 없던

침묵 덩어리가 추락한다

녹슬고 있는 나의

시간 속을






# 김시종 시인은 1929년 부산에서 태어나 제주에서 자랐다. 1948년 4.3 항쟁에 참여했다가 이듬해 1949년 일본으로 밀항했다. 오사카 조선인촌에서 살며 1950년 무렵부터 일본어로 시를 쓰기 시작했다. 1966년부터 오사카전문학교 강사 생활을 했다. 2011년 <잃어버린 계절>로 41회 다카미준상을 수상했다. 시집으로 <지평선>, <일본풍토기>, <장편시집 니이가타>, <이카이노시집>, <화석의 여름>, <경계의 시>, <잃어버린 계절> 등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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