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경포호변 - 심재휘

마루안 2019. 11. 2. 19:21



경포호변 - 심재휘



가위로 오려놓은 늦가을 속에
비 맞는 거미줄을 가지바다 달고 있는
벚나무가 있다


호변이었으니 물은 너무 넓고
물가 한 바퀴 도는 시간을 기다려달라 말하기가
미안하여서 결국은 떠나간 사랑이 있었으니
기다릴 수 있다고 말하지도 못한 후회가 여기 서 있으니


옷에 스미는 비를 맞으며 누군가가
사랑을 잃은 마음을 펼쳐 보여준다 한들
크기를 멈춘 저 오래된 나무만 하랴


뒷문을 열어놓은 고요가
수면 아래에서 새어나가는 세월에게
이 풍경의 운명만 빼고 모두를 내어주는
그저 비를 맞는 나무가 있으니


오늘은 호숫가를 도는 사람도 없이
희미한 파도 소리를 주머니에 넣고
주머니에 넣고



*시집, 용서를 배울 만한 시간, 문학동네








안녕! 풍전여관 - 심재휘



한 번만이라도 다시 들어가 잠들고 싶은 방이 있다
경포 바닷가 솔숲에
내가 고개를 동쪽으로 돌리면 미리 불어주는 바람 속에
퐁전여관이 있다


신고 버렸던 평생의 신발들은 다 기억할 수가 없고
그때그때 신발들의 소리는 조금씩 다 달랐지만
언제나 잊을 수 없는 풍전여관은 늘 맨발의 풍전여관
맹세를 버리지 않는다 해도 돌아올 사랑이 아니라는 것은
진즉에 알고 있어서 생각할 때마다 가슴에 베이는
어쩌자고 풍전여관은 거기에 있나


젊음은 묵힐 수 없도록 쉬 낡고
추억은 더디 식어서 더욱 오래 쓸쓸하고


그러니까 나는 한때 풍전여관에 살았던 거다
지금은 없는 풍전여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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