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슬픔의 유통 마진 - 이성배

마루안 2019. 11. 2. 22:25

 

 

슬픔의 유통 마진 - 이성배

 

 

밭떼기로 넘긴 싱싱한 슬픔에도 유통 마진이 붙는다.

더 이상 생산자가 주장할 권리가 남아 있지 않은 구조인데

세계적으로 보자면, 남미 대륙 콜롬비아의 내전과

베트남 민중의 가난과 아프리카 대륙 에티오피아의 기아는

슬픔을 지배하는 최적의 환경인 셈이다.

 

점액질 가득한 생두의 껍질을 벗기고 말려 알맞은 온도에서 볶는 과정이 모두

원산지의 희망을 탈피하는 과정이다. 가혹하지만,

소비자들이 음용 가능한 단계까지 마진 없는 노동의 몫이다.

 

가공을 거친 슬픔은 햇빛이 부족한 소비자들에게 유용한 상품이므로

가끔, 낭만적으로 생산지 이름이 고급스러운 기호가 되기도 한다.

 

배추를 갈아엎고 참외나 감을 트렉터로 뭉개는 것은

노골적으로 밭떼기를 강권하는 자본의 힘을 보여주는 역설일 뿐,

생산 단가는 유통 마진에 포함되지 않는다.

 

오, 전 지구적인 슬픔에 대해 일방적 유통구조는 부조리하다.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배달원 기식이 - 이성배

 

 

열여덟 기식이는 읍내 중식집 배달원,

나이와 이름을 아는 사람은 없었지만

흰 양말에 삼선 슬리퍼만 보고도 거주지가 파악되었다.

 

비 오는 밤, 십리 길을 달려서도 자장면이

야들야들하다고 칭찬받는 읍내 배달계의 유망주.

오토바이 타고 달릴 때는 송골매 같고

홀로 앉아 단무지 포장할 때는 발목에 줄 묶인 닭 같던 아이.

 

식당 쪽방에서 여동생과 단둘이 살아도

교복 입은 여동생만 보면 양파 같은 웃음이 번지던 기식이.

삶과 죽음, 그 경계의 온도가 36도 부근이라는 걸 안다는 듯

일찍 오토바이 운전이 노련해진 아이.

 

늦은 오후 터미널 사거리,

생과 생이 충돌한 현장에 짬뽕 국물이 쓸쓸하게 번졌고

황급히 모여든 사람들은 그제서야 삶이라는 게 맵고 짜다는 걸 목격했다.

 

아무 일 없다가 아무 일 없었던 그곳에서 짧은 생은

비보호 좌회전 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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