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친구들 - 이현호

마루안 2019. 10. 31. 21:29



친구들 - 이현호



내가 잘 있는지 궁금할 때면 너의 안부를 묻는다
"살아서 귀신이다." 너는 대답한다


여전히
거식증 환자가 음식을 대하듯 사람 눈빛을 마주보지 못하는구나


그래도 그렇지, 살아 있는 귀신이라니
생귀신(生鬼神)이라는 말을 사전에서 찾아내고서야
내가 좀 살 것 같아진다


너의 빈손이 나의 빈손에게 안부를 돌려주고
"죽지 못해 산다." 나는 웃는다


아직도
삶을 과식해서 만성 체증을 달고 살아 명치끝에 걸려 내려가지 않는 이름들을 두드리며


살아 있는 귀신과 죽은듯이 사는 사람의 대화는
사는 게 사는 게 아니고 죽는 게 죽는 게 아니라서
이도 저도 아니어서 이러나저러나 마찬가지여서


우리는 다른 친구의 안부를 묻고 또다른 친구의 안부는
속에 묻는다, 귀신같이
연락 한 번 없는 친구는 우리의 자랑


서로의 무소식을 기다리며 우리는
안녕보다 먼저 안부를 묻는다


둘도 없는
친구니까



*시집, 아름다웠던 사람의 이름은 혼자, 문학동네








청진(聽診) - 이현호
-북아현동



나는 올해로 서른 살이 되었다
누구보다는 오래 살았고 누구보다는 일찍 죽는다
그때부터 오늘까지 지금부터 그날까지


내 모든 날의 별자리가 떨어져내리는 밤
당신의 이름을 부표로 띄우고, 마음의 수위를 더듬는 밤
오래 돌보지 않은 불행에게도 정이 드는 밤
급한 마중을 하려는 듯 긴 골목을 맨발로 뛰어나가는 바람 속에서
웃음소리가 높고 맑았던 소현이나 제법 점을 잘 쳤던 장호 같은
너무 젖어서 떠오르지 않는 얼굴들을 건지다 보면
국제나 굴레방이란 이름의 여관방을 넘어오는 소리가 들리는 듯


오늘은 기일, 세상의 매일은 누군가의 기일
나의 울음을 나에게 돌려주는 날


가난한 이의 마음은 더 가난하고, 가난보다 더 가난한 마음들
밤늦도록 깜박이는 술집을 비틀대며 나오는 단벌의 영혼들
십수 년 만에 어두운 천체를 찢고 가는 떠돌이별들
밤의 척력에 떠밀려 서로의 등을 마주 보이며 멀어지면
그 사이를 스치는 바람에게선 유독 낙엽의 맛이 돈다
언젠가 악수한 적 있는 시간의 손가락은 그새 많이 야위었다
생활을 무너뜨린 자리에 생활을 재개발하는 농담이 유행하는
북아현동, 우리는 이곳에서 여러 잠을 잤다


북쪽에 머리를 두고 자면 안 된다는데, 당신은 잠이 참 많아서
올해도 스물아홉 살이 되었다
지금부터 그때까지 오늘부터 그날까지


누구나 가슴을 허물어 내압을 확인해야 하는 날이 있고
이 별의 반대쪽에도
언 창문에 귀를 대고 숨소리를 청진하는 넋이 있겠다






# 이런 시를 읽을 때마다 젊은 시인의 시적 재능에 탄복한다. 사소한 일상도 그냥 넘기지 않는 섬세한 시선이 밀도 있는 싯구에서 그대로 느껴진다. 시 쓰기에는 연륜이 아무짝에도 쓸 데 없음을 알게 하는 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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