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다시, 생일 - 조항록

마루안 2019. 10. 31. 21:43



다시, 생일 - 조항록



고통의 시간은 너를 잊지 않았으나
오늘은 나뭇잎만 흔들린다
바람 불면 다 아득한 옛날


누가 낮은 노래를 좀 불러주면 좋을 것이다
아직 여린 너의 목덜미에서 피어나는 채송화는 수줍어
수수깡 같은 너의 손목을 잡고 길을 걸을 적마다
하늘은 더 내어줄 것이 없다


이대로 달라지지 않는 삶을, 어떡할 것이냐


목어(木魚)는 천 년이 지나도 강물에 환생하지 못한다
지금 지나간 별빛은 두 번 다시 온기를 되살리지 못한다


적막하구나, 다시 시월(十月)이 오고
다시 그물로도 가둘 수 없는 그림자, 고요


누가 낮은 노래를 좀 불러주면 좋을 것이다
흔들리는 나뭇잎도 맹세를 하던 한때가 있었다
어떤 다짐이 우두커니 창밖을 내다보며
울음을 견디기도 했다


그러니 오늘의 선물은 허공, 너의 어깨
그 비탈에 제법 많은 빈방이 흐린 불빛을 켠다
너무 늦은 시간이 아니라면 평화가 잠시 다녀갈 수 있다



*시집, 눈 한번 감았다 뜰까, 문학수첩








잠깐의 가을 - 조항록



한 소절 두 소절 남은 가을이 진다 한 곡조 다 부르면 수은(水銀)을 삼킨 겨울이다 어쩌면 간이역 같은 십일월이 가기 전에 십이월이 들이닥칠는지


외로움을 저미는 것은 북녘의 혹한보다 소슬바람 종일 커튼이 내려진 창문 안쪽에 후생(後生)이 산다 잎사귀를 털어낼수록 무거워지는 냐뭇가지의 허밍


심금(心琴)을 뜯으며 바닥이 쌓인다 행인들이 바닥을 밟으며 흐린 날씨를 포갠다 바닥에 이르러서야 귀 기울이는 소식들 가련하여 내어주는 한 줌의 어깨


왼쪽으로 서너 뼘을 더 재면 불현듯 벼랑이다 찬 없는 밥상에서 혼자 식사를 마친 남자의 뒷모습이 바스락거리고 지상에 뒹구는 것들 여간 성(聖)스럽지 않다






# 여름이 그냥 가기 아쉬운 듯 막바지까지 떼를 쓰다 떠난 자리에 시월이 머물더니 어느덧 시월의 마지막 날이다. 가을만 되면 물 만난 고기마냥 활개를 쳤으나 올 가을은 조용히 보냈다. 하긴 <이대로 달라지지 않는 삶을 어떡할 것인가>. 유난히 힘들었던 이 가을에 시 읽는 기쁨마저 없었다면 어쩔 뻔 했는가. 심금 울리는 시도, 깊어 가는 가을도 딱 내 마음이다. 낙엽이 채 마르기 전 11월도 서둘러 떠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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