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저물어 가는 오후 - 신경현

마루안 2019. 10. 29. 22:54



저물어 가는 오후 - 신경현



창문이 덜컹거리는 소리를 듣고서야
알았네
지나온 자리가 흔들렸던 이유가
바람 때문이 아니란 걸
낮은 골목 사이를
저물어가는 오후,
한때의 붉은 빛들이
뿌옇고 낡은 창문으로 들어오는 것도
습관적으로 찾아오는 게 아니란 걸
목을 꺾고
멀고 먼 하늘을 바라보면
가늠할 수 없는 슬픔은
감당할 수 없는 시간을
견뎌낸 사람의 회한이란 걸
알겠네
살아남아야 할 이유가
까마득하게 깊은 구렁으로 빠져드는
이 가을에



*신경현 시집, 당부, 한티재








아름다운 시절 - 신경현



밑 빠진 독에 물을 붓던 시절
채워도 채워질 수 없는
아름다움이 버글대던 시절
티브이를 켜면 걱정과 염려로 무장한
보험 상품이 세상을 안심시키고
흐릿하게 알전구 켜진 집으로
배고픔을 메단 사람들이 늦은 귀가를 하고
매장당한 유골처럼 뼈만 남은 희망이
쏟아지는 폭우에 쓸려 내려가던 시절
좌절할 기력마저 없어 몸져눕기 바쁘던 시절
연민과 동정을 뒤섞어 뿌려대던 선무방송은
얼마나 아름다웠나
나라님도 구제하지 못한 가난을 탓하는 건
엄연한 반칙
바짓가랑이를 잡고 늘어지더라도
살아남는 게 절대선이 되는
아름다운 시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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