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발원지 - 서광일

마루안 2019. 10. 27. 19:23



발원지 - 서광일



오래된 하수구 냄새였으므로


세면대 실리콘 사이에 낀 곰팡이 자국 위로
욕실 세제를 흠뻑 휴지에 적셔 놓았지만


타일 틈새를 따라 바닥 솔이 벌어질 때까지
분노의 솔질이 중지 첫마디 살점을 떼어 낼 때까지
수챗구멍으로 흘러드는 핏물에 헛웃음이 줄줄 새 나왔으므로


오래된 집엔 틈과 금이 얼마나 많은가
가구들은 약속이나 한 것처럼 십 년씩 늙어 있나
날벌레들은 얼마나 쉽게 짓뭉개져 얼룩이 되나


언제 잃어버렸는지 모를 자괴 따위가
막힌 변기를 뚫다 떠오른 칫솔처럼
하수구에 버려진 것들에 대해 책임지지 않았으므로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테이프를 덧발라 틈을 메워도
끝내 나는 하수구 냄새의 오래된 발원지였으므로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출판그룹 파란








고래밥 - 서광일



커다란 돛을 펴고 물살을 가르며 몇 개의 작살을 꽂고 떠돌고 싶었다 솟구쳐 봐도 직장을 구할 수 없었다


무턱대고 고래밥만 먹고 있는 너


알음알음 일용직을 기웃거리고 파트타임 알바에 오토바이 배달까지 이자는 이자를 낳으며 몸집을 불렸다


요즘엔 맵고 짠 음식에만 손이 가


숨만 쉬고 살아도 통장에선 돈이 빠져나가 아이들은 자랄 테고 학원에 다니고 끝나면 또 학원으로 가겠지만


너는 고래를 잡으러 로또 방에 간다


부스러기처럼 묻어나는 기대감 때문에 날마다 막막함을 조합해 여섯 개를 만든다


고래는 왜 그 커다란 몸집을 이렇게 작은 물고기들로만 채우는 걸까






시인의 말


상추와 토마토 모종을 심고 물을 뿌리는 일도
채석강 물보라에게 가슴 안쪽을 내어 주는 일도
천상열차분야지도를 하나하나 돌 위에 새기는 일도
태양게를 벗어난 보이저 1호, 지구의 속삭임도
어쩌면
당신에 관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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