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이 보내는 경배 - 우대식

마루안 2019. 10. 27. 18:51



바람이 보내는 경배 - 우대식



낮은 구름이 비를 몰고 와 스쳐간다
고원(高原)에서,
보낼 것은 보내고 누군가를 기다리기로 한다
돌담 낮은 처마 아래 앉아서 누군가를
기다린다는 것
오―이 길게 짐승 부르는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는다
넓고도 높은 구릉으로 오르는 길에는 단 한 그루
나무가 서 있을 뿐이다
나무에는 푸르고 붉은 힘줄이 엉켜 있다
대지 깊은 곳으로 혈육을 찾아가는 그의 여행은
아주 오래도록 지속될 것이며
한순간에 끝날 일이다
색이 바랜 달력이 걸려 있는 벽에 기대어
한 계절을 보내고 일어났을 때
아무것도 오지 않았고 사람은 늙어버렸다
한 철을 떠돌다 돌아온 산장지기는 깊은 목례를 보낸다
한자리에 있는 자에 대한 경례
바람이 보내는 경배를 받으며
다시 고원에 섰을 때
나무도 구릉도 모두 사라지고
짐승 부르는 먼 메아리마저 끊어졌다
자신이 디딘 중력을 잠시 잊고
새 한 마리가 탐욕의 비상을 멈춘 채
허공 한 지점에 오래도록 머물러 있었던 것이다



*시집, 설산 국경, 중앙북스








바람의 사원 - 우대식 



바람의 사원 흰 회벽에
두 줄기 눈물이 아로새겨져 있다
바람의 사원은
천국으로 가는 입구이거나
천 길의 낭떠러지
음각, 나의 사랑을 파 재끼기로 한다
세모꼴의 칼을 들고 직선의 사랑을
낭자한 피로 물들인다
두렵습니까
칼이 말을 걸어왔다
떨리는 목소리가 내 안에서 밀려 나온다
몽골 대초원에서 들었던 울림
이예
공손한 나의 대답이 초원으로 쓸려간다
한 번도 들어본 일이 없던 노래가 흐른다
알 수 없다
알 수 없다는 것
혼돈의 땅 위에 나는 발을 딛고 서 있다
시간이 많지 않다
바람의 사원에 무릎을 꿇고
머리를 처박는다
바람이여
다시는 나를 이곳으로 인도하지 마라
허무의 모가지, 모가지
고향을 떠난 염치없는 이리들이 들판을
배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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