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양파 망에 담긴 양파 - 박일환

마루안 2019. 10. 28. 21:58



양파 망에 담긴 양파 - 박일환



붉은 양파 망에 담긴 양파들을 보며
하필이면 일망타진이라는 말을 떠올리고
간첩단 검거까지 이어가는 건
얼마나 슬픈 상상력일까?


붉은 양파 껍질을 벗기면 햐얀 속살이 나오고
볏겨도 볏겨도 속은 그냥 하얄 뿐인데
그게 기분 나빠서 하얀 속살에 붉은 칠을 해대는 누군가를 떠올리는
나는 대체 무엇이 문제일까?


-1979년, 영문도 모른 채 수사기관에 끌려간 강원도 산골의 일가족 12명은 얼마 뒤 삼척고정간첩단이라는 이름으로 신문에 큼지막하게 등장했다(그들이 고문실에서 지르던 비명 소리는 어떤 신문 한 귀퉁이에도 흘러나오지 않았다) 2016년 5월, 대법원은 이들이 신청한 재심을 받아들여 최종 무죄판결을 내렸지만 두 명은 진작 사형을 당했고 세 명은 억울함을 풀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뒤였다. 간첩이라는 누명을 벗기까지 37년 3개월이 걸렸다.


붉은 양파 망에 담긴 양파들은
얌전히 제 운명을 수긍하고 끌려가지만
애꿎은 양파 놀음에 휩싸였다
속껍질이 다 발가벗겨진 뒤에야 겨우 양파 망을 벗어나야 했던
할아버지 한 분 아니 두 분, 세 분.....
양파 껍질을 벗길수록 눈물이 나는 이유에 대해
나는 도무지 설명할 말을 찾지 못하겠다



*시집, 등 뒤의 시간, 반걸음








너훈아가 죽었다 - 박일환



평생을 나가 아니라 너로 살았던 사람
큰 나무 그늘에 기대어 밥벌이를 했으나
치사하게 빌붙어 산 건 아니었다


짝퉁이 살아남기 위해서는
진짜보다 더 그럴듯한 진짜로 보여야 했으니
음색부터 표정까지 빈틈없이 맞추느라 애썼을
그의 노동은 가상한 바 있었으리라 


그라고 왜 벗어나고 싶지 않았겠는가
담쟁이처럼 악착같이 달라붙고 기어올라
마침내 스스로 빛나는 순간을 빚어보고 싶은 열망이
그라고 해서 왜 없었겠는가


김갑순, 향년 57세의 사내가 품었던 꿈은
자신의 이름을 건 음반을 내는 것
이루지 못한 꿈은 아스라하고
빈소에 찾아온 나운아, 니훈아들이
-아무도 찾지 않는 바람 부는 언덕에 이름 모를 잡초야
노래 한 소절 불러주었다지


나 뒤에서 너로 사는 동안
비록 쓸쓸했을지라도
훗날 무덤가에 잡초 무성히 돋거들랑
자랑처럼 걸어 나와 씩 웃어 보아도 좋으리라*



*윤동주의 <별 헤는 밤> 마지막 구절을 변용함.





# 시인의 올곧은 성품과 세상 보는 따뜻한 시선이 느껴지는 시다. 이불 속에서 혼자 자위를 하듯 자기만 아는 언어로 중얼거리는 시인들과는 다르다. 외계어 같은 시를 써 놓고도 유명 출판사에서 시집 냈네 자뻑하는 시인들이 부지기수다. 시인도 시도 쏟아져 나오는 활자 낭비 시대에 이렇게 서사성과 사회성이 적절히 조합된 시가 더욱 빛난다. 또 하나의 시인을 내 마음 속에 담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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