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탈출기 - 권상진

마루안 2019. 10. 22. 22:15



탈출기 - 권상진



악수는 시간의 물살에서 서로를 건지는 유일한 방법


치매 병동 입원실 침대 맡에서
처음 뵙겠습니다 손 내미시는 아버지


죽음의 미행을 직감한 듯 떨리는 손을
아들이라고 합니다 초면의 조력자가 덥석 손을 잡는다


첫인사는 나이를 다시 세는 리셋 버튼 같아서
우리는 오늘부터 1일


죽음을 상쇄하기 위해 매일 모르는 사람들을 만나서
갓 난 일흔아홉으로 다시 태어나는 아버지


질량을 잃어버린 행성처럼 멀어져가는 기억을
날마다 새로운 표정으로 듣고 있는 가족들


낯익은 이들의 방문이 잦을수록, 삶은 자꾸 멀어지고
더는 낯선 이를 만날 수 없는 날, 죽음은 번짐처럼 온다


문을 사이에 두고
증표처럼 인사를 나눠 가질 때


또 만나요 헤어짐은 언제나 여지를 남기지만
다시 올게요 나는 영원한 이별을 알아듣는다



*시집, 눈물 이후, 시산맥사








오답 노트 - 권상진



마지막 문제만 남겨둔 아버지는
평생 모아온 오답들을 다시 풀어보고 있는지
감은 눈으로 며칠 생각에 잠겼다
오늘은 새벽까지 병실 불이 밝더니
말없이 가족들에게 답지를 내밀었고
마침표는 주치의가 대신 찍어 주었다


아버지의 한생은 두꺼운 오답 노트였다
가족에 대한 문제에서는
붉은 밑줄이 그어지거나 두어 개 별표가 그려져 있었고
살짝, 반칙과 비굴을 선택한 문항에는
체크 표시가 주저흔처럼 떨려 있었다


아는 문제를 틀리고 돌아온 저녁,
아버지는 술 냄새가 옅어질 때까지 잠을 미루다
나를 무릎 앞에 앉히고서
나처럼은 살지 말어라 는 말을
큰방까지 들리도록 말하곤 했다


평생지기의 돈 부탁을 거절하고 오는 날
생시인 양, 아버지가 떠오르고
아내는 그 옛날 엄마처럼 내 눈을 피한다
또 한 페이지가 두꺼워진 나는
내력처럼
아이 방문 앞을 괜히 서성거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