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대, 나의 명왕성 - 권천학

마루안 2019. 10. 20. 19:26



그대, 나의 명왕성 - 권천학



허블이 짚어낸 우주의 속내
빛인지 그늘인지
노랑인지 파랑인지조차 보여 주지 않고 단지
가장자리가 뭉개진 빛과 어둠으로 보이는 혹은
노랑과 파랑으로 보이는 색 덩어리가 모호하다
그렇다면 내 안의 명왕성은 얼마나 모호하단 말인가
혼신을 다하여 그대를 한 바퀴 도는 데 248년,
당신과 나의 거리는 얼마나 멀단 말인가
어느 별에서 잠을 자더라도,
어느 처마 밑에서 바람으로 쓸려가더라도,
서로 잊지나 말자고 한 약속이 얼마나 부질없는
하늘에 떠 있는 별 같은 이야기란 말인가
빛의 난타 속에서 한 톨의 먼지로 떠돌고 있는 우리,
때로는 한 톨의 먼지가 비상식량이 되고
한 톨의 먼지 속에서 숨 쉬고
한 톨 떠도는 먼지의 숨구멍
하찮은 먼지의 약속,
도데체 얼마나 많은 명왕성이 내 속에 살고 있단 말인가



*시집, 노숙, 월간문학사








신발 속 세상 - 권천학



지리산 850리 도보순례길
논밭 둑에서도 자고 수풀 덤에서도 자면서
산자락 휘돌며 걷고 또 걷는 보름 동안
내 안으로 산도 들어오고 역사도 들어오고
발바닥에 생긴 물집 속으로
생애의 쓰고 아린 맛까지 끼어든다


때로 낯선 곳에서 몸을 바꾸게도 되는 법
어느 산모롱이에서 열반에 든 검정 등산화
산자락 귀퉁이에서 다비(茶毘)하여 보낸 후
궁색한 산골마을 방물가게 먼지 낀 좌판에서
어렵게 찾아낸 갈색 등산화와의 새로운 만남


바꾼 새 몸이 반들반들
자존심의 깃 빳빳하게 세우고 있어
발뒤꿈치 터지고
볼가진 관절들이 왈그락 달그락
몸 바꾼 걸음이 불화를 겪는다


서로 깎이며 견디는 사나흘,
불편의 시간을 얼마쯤 지나고 나서야
갈색 등산화가 자존심을 접고
관절들도 수그러들어
걸음이 조금씩 부드러워진다


물집이 잡히고 피가 터지긴 했지만
서로 덜어내며 보태는 사이
자리 잡혀 가는 신발 속
그 속에 조화로운 삶이 있었다






# 독특한 이름을 가진 여성 시인의 시집이 인상적이다. 시집 제목이 <노숙>인 이유와 시를 향한 시인의 열정을 느낄 수 있는 구절이 눈길을 끈다. 시집의 앞 부분에 이런 문구가 있다.


'유명한 무명시인'이 되겠다고 작정한 이후,
나는 노숙을 시작했다.
세상 귀퉁이 어디엔가 있을지도 모를 나의 거처,
세상 귀퉁이 어디에도 없을 나의 거처,
버리기로 했다.


은둔과 칩거,
그러나 내내 시인으로 살아왔다.


시인은 곡비(哭婢)다. 곡비여야 한다.
하여, 나는,
한 시대를 함께 건너는 사람들의 충실한 곡비가 되고


나의 시들은,
새로 태어날 시들의 효시(嚆矢)가 되고자 한다.


나는 우리 가계(家系)의 자손이면서 詩의 자손이다.
그러므로 나는 시의 혈통을 잇고자 한다.


여전히 바람이 분다.
그 바람 속에 혀를 파묻는 뜨거운 키스를 하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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