몸, 연민에 닿다 - 김창균
마치 가택연금 당했던 것처럼 금기의 말들이
한꺼번에 튀어 나오는 시간
내 몸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
아니 내 입에서 가장 멀리 있어
닿지 못하는 곳
새벽에 깨어
탱탱하게 불은 저 안쓰러운 말들을 만져본다
저녁밥을 짓던 그녀가 왔다 갔고
골목에서 마주쳤던 한 여자가 왔다 갔고
울면서 꽃을 버린 한 여자도 왔다 갔고
혁명을 꿈꾸던 사내들도 왔다 갔다
이데올로기가 한 시대를 자꾸 감옥에 가두어
혼자서는 이 부풀어 오르는 분기탱천한 말들을
어찌할 수 없다
서로들 쉬쉬하며 금기시하는 말과 그 공화국은
늘 가까이 있건만
유연한 당신의 입과 몸은 멀리 있다
탱탱하게 불고 불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검열당하는 연민이여
한겨울에는 별들이 더
북쪽하늘에 치우쳐 떴다 사라진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난전에서 종(鐘)을 사며 - 김창균
소리도 수줍을 때가 있는지
가끔은 바람 소리보다 작거나 간드러질 때가 있다
오지의 오일장 만물상에서 주먹만 한 종 하나를 산다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는데 때가 곱게 낀 모습이
한때 멀리까지 소리를 보낸 적이 있을 듯싶다
난전에 서서 어묵을 먹거나
종을 사는 사람은 분명 외로운 사람
소리 내지 말라고 종 속에 건들거리며 걸려 있는
불알처럼 생긴 방울을 신문지로 감싸 가방에 넣고
꽤 오랫동안 걸었는데
죽여놓은 소리들도 걸어서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돌아오는 소리는 이명처럼 애틋함이 배어 있다
시작과 끝이 다른 말들이 여기서 저기까지
원근을 뭉개며 갔다 온다
멀리 아주 멀리 갔다 온 소리는
오래 병을 앓은 한 인간을 안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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