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몸, 연민에 닿다 - 김창균

마루안 2019. 10. 20. 18:49



몸, 연민에 닿다 - 김창균



마치 가택연금 당했던 것처럼 금기의 말들이

한꺼번에 튀어 나오는 시간


내 몸에서 가장 멀리 있는 것,

아니 내 입에서 가장 멀리 있어

닿지 못하는 곳


새벽에 깨어

탱탱하게 불은 저 안쓰러운 말들을 만져본다

저녁밥을 짓던 그녀가 왔다 갔고

골목에서 마주쳤던 한 여자가 왔다 갔고

울면서 꽃을 버린 한 여자도 왔다 갔고

혁명을 꿈꾸던 사내들도 왔다 갔다


이데올로기가 한 시대를 자꾸 감옥에 가두어

혼자서는 이 부풀어 오르는 분기탱천한 말들을

어찌할 수 없다


서로들 쉬쉬하며 금기시하는 말과 그 공화국은

늘 가까이 있건만

유연한 당신의 입과 몸은 멀리 있다


탱탱하게 불고 불어도 어찌할 수 없는

검열당하는 연민이여

한겨울에는 별들이 더

북쪽하늘에 치우쳐 떴다 사라진다



*시집, 마당에 징검돌을 놓다, 문학의전당








난전에서 종(鐘)을 사며 - 김창균



소리도 수줍을 때가 있는지

가끔은 바람 소리보다 작거나 간드러질 때가 있다

오지의 오일장 만물상에서 주먹만 한 종 하나를 산다

만들어진 연대는 알 수 없는데 때가 곱게 낀 모습이

한때 멀리까지 소리를 보낸 적이 있을 듯싶다


난전에 서서 어묵을 먹거나

종을 사는 사람은 분명 외로운 사람

소리 내지 말라고 종 속에 건들거리며 걸려 있는

불알처럼 생긴 방울을 신문지로 감싸 가방에 넣고

꽤 오랫동안 걸었는데

죽여놓은 소리들도 걸어서 어디까지 다녀왔는지

돌아오는 소리는 이명처럼 애틋함이 배어 있다


시작과 끝이 다른 말들이 여기서 저기까지

원근을 뭉개며 갔다 온다

멀리 아주 멀리 갔다 온 소리는

오래 병을 앓은 한 인간을 안고 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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