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적막 - 오창렬

마루안 2019. 10. 19. 22:08



적막 - 오창렬



거미는 오늘도 적막 한 채를 친다


어제의 침묵과 오늘의 침묵을 꿰맨 솔기는
자모음(子母音)의 결합 같아서
바람도 허물지 못한다
유(類)가 다른 것들엔 눈길도 주지 않아
햇살 같은 것은 그 먼데서 온 가속의 힘조차 퉁퉁 튕겨버리고
거미가 실제 치는 것은 허공이다
영롱하던 이슬 사라진 자리
빈 그물 가득 허망을 짜고 막막해지는 것이다
스러져간 이슬 눈물로 맺혀오도록 막막해지는 것이다
그리하여 우물 속처럼 깊어지는 적막


기다리는 것들이 오지 않고
오지 않는 것들을 기다리는 날들이 오고
어쩌다 잠자리라도 한 마리 풍덩, 빠지는 날이 와서
출렁, 허공 깊이 파문이 이는 그때
처렁, 가슴이 내려앉으며
전율하듯 나는 깨닫기도 하는 것이다


저 숭숭한 허공이 무너지지 않는 길이었음을
저 막막한 적막이 무궁한 양식이었음을



*시집, 꽃은 자길 봐주는 사람의 눈 속에서만 핀다, 모악








긁다 - 오창렬



일과 일 사이 휴식할 때나
자리에 들어 잠을 청하는 때 같은 막간을 틈타
어김없이 내 안에 드는 사람이 있다
내 안으로 들어와 가슴을 긁는 사람이 있다
하루 한 달도 아니고 일이 년도 넘게
긁고 또 긁는 걸 보면
못 같이 뾰족한 데가 있을 것 같은
그러나 뾰족은커녕 모서리조차 없이 부드러운
내 안에서 아예 살고 있는 사람이 있다
꺼내 종이에 그려보기라도 할라치면
문득 얼굴조차 떠오르지 않는 그리운 사람
사그락사그락 종이 긁는 소리를 낼 뿐
글로도 그림으로도 그를 형용하기는 힘들어
하릴 없이 창밖에는 가을이 오고
가을이 긁는지 가을을 긁는지
단풍나무 은행나무 회잎나무 온통 물들고 있다
가을 붉나무처럼 내 안도 물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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