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은둔형 오후 - 유계영

마루안 2019. 10. 20. 19:12



은둔형 오후 - 유계영



맑은 날 비가 내리면 창밖을 봐주기를 염원하는 누군가의 기도가 통했다는 것
거울은 긴 팔로 방의 꼭짓점들을 끌어안고 있다
아무와도 연결되지 않은 핸드폰을 만지며
울고 웃는 한 사람을 지켜주려고


거울의 관심은 오직 자신뿐이지 그러나
은둔자의 관심사는 오직 외부에 있기 때문에
둘은 오랜 우정을 쌓을 수 있다


자나깨나 자신만을 비추는 거울을 문득 극복해보고 싶은 것이다
이렇게 맑은데도 비가 내리기 때문에
은둔자는 거울을 떼어다 골목에 내놓았다


가져가면 필요하시오 누구든 필요하시오
환영은 아무나


그는 방으로 돌아와
네 개의 꼭짓점을 백오십팔 개씩 겨누고 있는 서적들을 바라본다
그 위로 작고 부드러운 먼지들이 가라앉는다
거울의 민감한 팔에 붙잡히지 않으려고 둥둥 떠다니던
사각형의 책상과 침대
의외로 육각형인 강아지 얼굴
인중이 뭉개질 때까지 콧물을 훔치게 했던 피크닉의 기억이
바닥에 잘 붙어 있는 것을 바라본다


허술한 태양이 자신의 꼭짓점을 놓칠 때
맑은 날 비가 내렸다


사선으로 내리는 비는 누군가 기도중이라는 의미일까
저주가 기도의 내용으로 부적격하지 않다면


우산의 어설픔 때문에 온 얼굴이 침 범벅인 행인들 사이
거울은 빗방울을 속기하고 있다
자신을 다시 주워오기 위해 헐레벌떡 뛰어올
한 사람을 지켜주고 싶어서



*시집, 이런 얘기는 좀 어지러운가, 문학동네








마침내의 날 - 유계영



소각장 화단에 사루비아가 피었다 삐뚤게 그린 눈썹처럼
고약하지도 향기롭지도 않은 상태로


콧김을 씩씩거리며 난투를 벌이러 온 자들의
낭만적 사랑을 조금도 잠재울 수 없을지라도


크고 유명한 병원이 있는 동네라면
아무 버스나 잡아타도 병원에 갈 수 있다


공단에서 병원으로, 각돌 구름을
대학에서 병원으로, 방석처럼 깔고 앉은 태양이
병원에서 병원으로, 끝없이 끝없이


아파질 날들은
편리하게 수송될 필요가 있다


우리는 머지않아 만난다 버스 안에서
울상을 들켜버리고 쉽게 낙담하는 마음을 알아보면서
죽을 뻔한 경험 속에서도 오로지 웃음거리를 찾기 위해서


버스 차창에 누군가 손가락 글씨를 적어둔 흔적
다음 순서는 무엇입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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