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람의 계보(係譜) - 조영민

마루안 2019. 10. 19. 21:57



바람의 계보(係譜) - 조영민



내 생의 절반을 바람이 경작했지요
앞강을 휘감던 검은 대숲이 댐 밑으로 사라졌을 때에도
바람이 된 아버지의 주소가 강기슭 쪽으로 옮겨갔을 때에도
세상은 바람의 통치권 아래에서 이동하는 순종을 배웠지요
그러나, 내 희망은 수시로 무풍지대로 돌변했고요
회색빛 건물들이 나를 범람할 때마다 바람의 족적을 수소문했어요
깨진 병도, 담배 연기도, 골목을 짖는 개와,
사타구니에 잔털이 돋기 시작하던 나의 어린 첫 키스의 기억조차도
바람은 내 몸을 통과하며 하나씩 견인해갔어요
더러는 떠나보내지 말았어야 할 것들도 많았지만
대부분 후회하지 않았어요, 나는 자연주의자거든요
바람의 혈통만 붙잡으면 내 꿈들은 습관처럼 계승된다는 걸
차츰 가벼움을 배우기 시작하면서 그때 알았어요
내 몸에 바람 냄새가 나면서부터 충치처럼 나를 흔들던 그믐달이
더 이상 흔들리지 않았어요, 때로는 수천 개의 붓이 내 몸을 훑고 가거나,
찢어진 창호지 문살 같은 온몸의 뼈 사이에도 바람은 둥지를 틀었어요
바람의 손을 잡으면 순식간에 나는 허공의 단단한 길이 되곤 했어요
세상의 바람을 딛고 지름길로 가고 싶었지요
자신의 영혼을 무엇으로도 채우지 않는 나비들조차
인간의 길을 버리고 바람의 길로만 다닌다는 것을 그때 모두 알았어요
어머닌 떠도는 바람이 싫다고 하셨죠
허공을 밟으며 오는 바람의 발을 볼 수 있는 건
내 피의 바람의 유전자가 흐르고 있기 때문이죠



*시집, 사라지는 것들, 현대시학








해바라기 - 조영민
-적막한 家系



일찍 골목길을 깨운 그가 몇 모금 태양을 마신다
파이프 관처럼 긴 몸 안쪽에 햇살을 가둔다
모두가 떠난 담장 한켠에서, 아지랑이 같은 그리움을 마신다
오래된 회전의 반경을 따라 습관처럼 태양을 감아 들이는 해바라기
사내는 추억의 각도가 위태로울 때마다
오래전 떠나간 긴 머리를 체념하듯 시든 잎들을 버린다


한낮에 몇 모금 태양을 섭취하는 일은
느슨했던 기억의 각도를 단단히 조이는 일이다
노란 회전축이 저 멀리 빈사의 장독대를 조이고
지난여름 태풍이 풀어놓은 담장을 조이고
한동안 잘 수습되지 않던 실연의 낭패감을 팽팽하게 조이는 일이다


그러나, 삶이란 한순간만 부주의해도 헐거워지는 것
한때 그의 어머니는, 쉽사리 헐거워지곤 하던 아들의 운명조차
애써 단단하게 간섭하려 들곤 했고
그런 날, 충전된 씨앗들은 저간의 세월을 꺼내
흑백의 기억 한켠에 하루 치의 노을을 붉게 걸어두곤
어디론가 캄캄하게 점등되기도 했다


사내의 시든 잎사귀 위로 어둠이 싱싱하게 내려앉는 저녁
얼마 전 도시로 떠난 뒤꼍 빈집에서 들려오는 초침 소리가
밤새 어머니의 남은 생을 시한폭탄처럼 째꺽- 째꺽- 조여오기 시작한다
그 사내, 한동안은 더 주술 같은 태양을 맹신할 것이고
가끔은 어머니 곁에서 잘 여문 그리움들을 까맣게 털어낼 것이다






# 조영민 시인은 1970년 전남 장흥 출생으로 삼육대와 동 대학원을 졸업했다. 2012년 영남일보 문학상과 <현대시학>에 작품을 발표하며 등단했다. <사라지는 것들>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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