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근접과거 - 최명란

마루안 2019. 10. 18. 22:08



근접과거 - 최명란



수서우체국 앞을 지나는데
노란 수국 큰 화분...
거기 가을이 있었습니다
갑자기 밀어닥치는 그리움
아, 가을이 맞습니다


수서역으로 사푼사푼 걸음을 옮겼습니다
단단한 지하철이 꿈틀거리며 다가옵니다
좌우로 흐물흐물 몸을 흔들며 옵니다
어제
한 치 틈도 없이 몸을 포갠 뜨끈한 레일이 그리워
오늘 또 꿈틀꿈틀 다가오는 것입니다
어두운 터널 속에서 기척도 없이, 몸부림도 없이,
그리움은 어제 갔던 곳을 또 가는 여행입니다
몸과 몸을 포개는 일은 어제와 오늘이 만나는 일입니다
수없이 헤어져야 수없이 다시 만납니다
그래서 이별은 간혹 달가운 일입니다
미끄러지듯 다가와서는
뜨겁게 달궈진 몸 길게 눕혀두고 지하철은 또 떠납니다
레일은 밤낮 길게 누워 지하철을 기다립니다
사라짐으로 다가오는 이 설렘
기다림에 사무쳐 나는 나를 잊을 때가 있습니다
아... 가을이 맞습니다



*시집, 이별의 메뉴, 현대시학








복합과거* - 최명란



죽는 순간 그 이전은 전생이다
무표정한 과거는 아득한 전생을 통과한 길
베개 옆 눈물에 젖은 자리
전생의 길이 가까울수록 아프다
천둥과 구급차와 신호 벨이 한꺼번에 울어대는
과거는 장면을 바꿀 생각이 없으니
과거여 이제 그만 ㅡ
어제의 해와 오늘의 해가 모여 오늘의 달이 간다
배고픈 사람들에게 해 대신 달이 오면 안 되나
얇은 냄비 뚜껑이 끓는 물에 잠시도 가만있질 않고 폴짝거리고
가난한 자는 애인도 여러 철 쓸 수밖에 없다
두 가슴이 볼록한 건
두 손이 오목하기 때문이란 다짐은 늘 어리석을 뿐
못 다한 사랑은 단풍보다 아름답고
향긋하고
달큰해
고독처럼 웃었다



*복합과거: '현재를 기점으로 과거의 한 시점에서 완료된 동작' 그 결과 현재까지 영향을 미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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