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버려진 길을 딛고 삶은 일어서는가 - 윤현주

마루안 2019. 10. 15. 21:49



버려진 길을 딛고 삶은 일어서는가 - 윤현주



미포에서 청사포 휘돌아 송정까지
낡은 오르간 건반 위를 안단테로 걸으면
추억의 소나타가 파도소리에 실려 퍼진다


삶의 무게와 속도가 떠난 뒤
시간에 버림받은 관 속의 사자(死者)처럼
창백한 얼굴로 누워 있는 동해남부선 폐선


객일 땐 차창 너머 훔쳐보던 조각보 같은 바다풍경
비로소 온전한 보자기로 꿰어 맞추며
주인의 걸음으로 생의 변곡점 돌고 있는 행렬


버려진 길을 딛고 삶은 일어서는가
상여 길을 되짚고 와 산 자들은 새날을 맞고
아버지 지게의 길을 지우며 내가 걸어왔듯이
이별의 캄캄한 밤을 구워 먹고 해를 토해 내듯이,


기차의 도착음 울릴 때마다 벌렁거리던 심장 멈춘
철길 위에 달빛 조화가 수북이 쌓이고


빈 가슴의 사람들이 밤늦도록
희망가를 부르며 걷고 있다



*시집, 맨발의 기억력, 산지니








기자들 - 윤현주



나는 노쇠한 개, 이빨은 파뿌리처럼 뽑혔고
야성은 서리 맞은 들풀이오
어둠마저 빨려 들던 눈의 광채는 어둠에 갇혀버렸고
십 리 밖 악취를 낚아채던 후각은 권력의 향기에만 민감하오
절룩거리며 변방에 얼쩡거리면 영락없는 유기견 신세,
컹 컹 컹, 푸른 야생의 시절이 파노라마로 흘러가오
구름이 흩뿌려 놓은 국경을 해와 달 따라 휘돌며
무도한 맹수들과 일합을 겨루면서 잔뼈가 굵었다오
공분의 심연에서 길어 올린 짖는 소리에 들짐승들 혼비백산,
물었다 하면 턱뼈가 날아가도 놓지 않는 근성이 파다했다오
검은 봉투 속 미끼는 레몬 향 대하듯 했소
하지만 인간의 손을 타면서 타락은 연기처럼 스며들었소
목줄을 풀어 버린 식탐에 유들유들 살집이 잡혀갔고
스마트한 통제에 자아검열의 올무에 걸리고 말았소
영혼의 호수엔 별 대신 내려앉은 비겁의 앙금들
도적이 먹이를 던져 줘도 꼬리를 흔들어 대고
앞의 개가 짖으면 영문도 모른 채 따라 짖기도 했소
애완견들의 재롱에 선악의 뿌리가 뽑히고
보이지 않는 손이 휘두르는 몽둥이에 상처 입고
밥이나 축내는 축생으로 퇴락한 나는
개울에 떨어진 낙엽처럼 개의 영토서 흘러가야 하오
가슴속 작은 불씨로 보듬어 온 詩의 땅으로 망명하려 하오
날카로운 본능의 이빨 대신 핏빛 꽃잎의 입술로
물어뜯는 대신 검붉은 서정을 짖어보려 하오
누가 알겠소 조개처럼 딱딱해진 영혼의 묵은 상처가
진주처럼 영롱한 시어(詩語) 하나쯤 해감할지!






# 한놈만 죽을 때까지 패자는 심사일까. 조국 장관 문제로 인해 요즘처럼 언론이 비판을 받은 적이 있었던가. 직업 의식이 하루 아침에 만들어지는 건 아닐 테지만 언론에 종사하는 사람들에게는 유난히 직업 정신이 필요하다. 긴 시간 언론사에서 밥을 먹은 시인의 시를 읽다 떠오른 생각이다. 깨시민의 집단 지성이 더욱 분발해야 할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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