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날 - 성백술

마루안 2019. 10. 10. 22:04



가을날 - 성백술



어이없이 봉구가 갔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같이 어울려 술을 마셨던
그가 한줌 뼛가루가 되어
이 가을 산기슭 뗏장을 쓰고 드러누웠다
누가 그를 쓰러뜨린 게 아니라
스스로를 못이겨 자신을 쓰러뜨렸다


쓴 소주에 감나무 살충제
깍지벌레 약을 타면 무슨 맛일까
독에 술을 타면 구토증도 없다는데
오장육부를 불에 확 싸질르고
그 질긴 목숨줄 놓아버릴 만큼
그가 원하던 삶은 무엇이었을까


첫 번째 마누라, 아이들과 헤어지고
고향에 돌아와 농사지을 때 벌써
생과의 질긴 인연 알아봤어야 했다
마을 공회당 가게를 보던 두 번째 마누라
있는 돈 없는 돈 다 훑어 도망갔을 때
아, 인생은 이런 게 아니다 싶었는데


조폭 출신이라는 세 번째 마누라 얻어
그래도 열심히 살아보려고 맘먹었는지
청년회 회장에다 동네 반장에다
천마산 자락에 산양삼 심어놓고 복숭아 키우며
가을이면 곶감 깎을 감나무 돌보면서
달덩이 같은 아들 하나 보고 참 바쁘게 살았는데


시골에서 농사지으며 산다는 것은
가마니를 뒤집어쓴 것처럼 답답한 일
더구나 젊은 여자가 시골에서 산다는 것은
그저 남편 하나 하늘처럼 믿고 사는 것뿐인데
어쩌자고 그 마누라 돌도 안 된 어린것 들쳐업고
또다시 대처로 도망질을 쳐댔는지


이 가을 맑은 햇살 아래
묏등에 말라가는 잔디 덧없다.
훗날 자식들이 와서 아버지라도 찾을까봐
화장을 하고서도 뼛가루 뿌리지 않고
묘지를 갖췄다는데. 도망간 그 마누라
아무것도 모르는 갓 돌배기 아는지 모르는지


생전에 그렇게 열심이던 감농사
주인을 잃은 감나무는 빨갛게 익어가고
늙은 부모 마루 끝에 앉아 먼산만 바라본다



*시집, 복숭아나무를 심다, 시와에세이








무량산 - 성백술



산은 쉬 속내를 드러내지 않는다
햇살 맑은 가을 속을 걸어 한나절 산길을 헤매고도
아직은 무량산 그 깊은 속을 이루 다 헤아릴 길 없다


숲 그늘에 낙엽들 뒹굴어 쌓이고
바람에 날리는 기억의 편린들이 발목을 덮는 계절
한 편의 지도를 보듯 굽이굽이 정상를 찾아가는 길이
나이 사십 줄에 든 인생길 같다


산속으로 들어서면 산은 보이지 않고
계곡과 능선으로 이어진 숲길만 아득해
겨울 채비를 서두르는 헐벗은 나무들
고스란히 맞아야 할 겨울 눈보라가
한세월 건너야 할 모진 세월들이
늦가을 바람 속에 눈에 밟힌다


처음엔 그저 가볍게 빈손으로
바람이라도 쐬러 나섰던 산행 길에
이제는 이미 너무 멀리 와버려
돌아서 내려가기엔 아쉬워 꿈만 같고
마저 오르기엔 숨 벅차 만만치 않다


등에 흥건히 땀이 젖는다
숨이 턱까지 차오른다
내 생은 절벽을 움켜쥔 채 기어오르는
소나무며 참나무 뿌리를 닮았다
땀 흘려 온몸으로 부대끼며 가뿐 숨을 몰아쉰다


마침내 정상에 서자
어렴풋한 산의 윤곽이 잡힌다
발아래 안개 낀 도시와 연기
도로와 강물이 흘러가는 곳
하늘을 이고 선 연봉들의 좌표 속에
무량산 봉우리 우뚝 솟아오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