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매복의 거처 - 전형철

마루안 2019. 10. 9. 19:15

 

 

매복의 거처 - 전형철


운명이
등 뒤에서 날아오는 돌멩이라 했다
무릎 반쯤 차오른 숨을 골라도
아무것도 아닌 것과
아무 데도 아닌 곳에
연금된 몸뚱이
잘못이 아닌데도 당하고
파국은 쉽게 송곳니를 드러냈다
음모에는 늘 우연 같은
공명의 일곱 색깔 안개가 서리고
금기에는 방향 없이
남은 거리만 알리는 소금 기둥이
밀랍 이정표로 서 있다
통찰(通察)과 간파(看破)와 교란(攪亂)과 반계(反計)와
신산(神算)과 신중(愼重)과 척사(斥邪)와 무쌍(無雙)의
단추를 채우며 산다
적들의 입술을 매혹하는
수상한 향기
내가 터득한 가장 슬프고 외로운 진법,
내처 혼(魂)의 심장이
모래주머니처럼
도사린다


*시집, 고요가 아니다, 천년의시작


 

 

 


파투 - 전형철


패를 던지거나 판을 깨는 일은
한 판 더 하자는 의미인가
이제 그만 되었다는 것인가

반쯤 열린 창문에 걸린
월력이 날릴 때
시간의 솔기는
호기롭게 뿌려 대는 개평 같고

멍든 몸이, 차라리
몸에 드는 멍이 낫겠다 싶지

혼자 쪼그리고 앉아
채 마르지 않은 시멘트 위 발자국을
지우고 다시 지우고
뒷걸음질 치는 가재의 걸음걸이로

풀리지 않는 매듭을 자르다
제 손목마저 잘라 버린

파산의 계절들, 멱을 따고 투신하는
이토록 정처 없는 실명의 적지(赤地)들

 

 

 

 

# 전형철 시인은 1977년 충북 옥천 출생으로 고려대 국문학과를 졸업하고 동 대학원에서 박사과정을 수료했다. 2007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고요가 아니다>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