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 이영광

마루안 2019. 10. 17. 19:22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 이영광



당신에게 도달하는 그리움은 없다
그리움은 내게로 온다
기름을 만땅으로 넣고 남쪽 바다 수직 절벽까지 가서
흰 갈매기들의 보행 멀리, 구멍뿐인 공중을 팽팽히 당겨보다가도


시월 햇빛 난반사하는 끓는 가마솥, 그 다도해에
무수히 뛰어 들어보다가도,
그리움은 그리움의 칼에 베여 뒹구는 것


우리가 두 마리 어지러운 짐승으로 불탔다 해도
짐승으로 세상을 헤쳐갈 수 없어
한 짐승은 사람이 되어 떠나고,
짐승으로 세상을 헤쳐갈 수 없어
한 짐승은 짐승으로 남았으므로


칼을 녹여 다시 불을 만들 순 없다
제 골대로 역주행하는 공격수처럼 멍청히
뭉그적대는 귀경 차량들 틈에 끼어들 수밖에 없다
다급한 건 생환이어서,
길은 충청도계에서부터 저렇게 밀리는 것이리라


짐승을 사랑할 수 없어
당신이 두 마리 사람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사람을 사랑할 줄 몰라 내가
두 마리 짐승으로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리움은 제 굴혈로 돌아온다
사 들고 온 비닐봉지를 헤쳐 뭔갈 또 우물거리는 밤
당신에게 나눠 줄 그리움이란 애초에 없었던 거다
혼자 갉아먹기에도 늘 빠듯했던 거다


우리는 사랑이라 부르던 무른 벌레를 눌러 죽였다
우리는 살기 위해 평생을 허비할 것이다



*시집, 끝없는 사람, 문학과지성








외계인이 와야 한다 - 이영광



콩가루 집안도 옆집과 싸움 나면 뭉치고
툭탁거리는 아이들도 딴 학교랑 축구하면 함께 응원을 한다
딴 동네 딴 도시 딴 지역과 다툼이 나면
한 동네 한 도시 한 지역이 된다


전라도와 사이가 틀어지면 경상도가 된다
경상도와 맞설 때면 전라도가 된다
북한과 다툴 때는 남한이 되고
월드컵만 열렸다 하면 아우성치는 대한민국이 된다


그러므로 외계인이 쳐들어와야 한다
성간우주(星間宇宙)를 안마당처럼 누비고 다니는
외계 우주선들의 어마어마한 공습 앞에서
미국과 중국이 손을 잡을 것이다
서방과 아랍이 연대할 것이다
동아시아 제(諸) 국가들이 단결할 것이다


외계인이 와야 한다
모든 국경이 폐제되고,
기독교와 무슬림이 형제가 될 것이다
모든 호모사피엔스가 하나가 될 것이다
인간과 사자와 뱀과 바퀴벌레 들이
한마음 한뜻으로 스크럼을 짤 것이다


더 큰 적이 나타나고 더 큰 싸움이 나는 수밖에 없나?
외계인이 와야 한다
전 세계 모든 나라가 잿더미가 되지 않을까?
외계인이 와야 한다
전 지구 생명체들이 흔적도 없이 사라지지 않을까?
외계인이 와야 한다


다른 별들에서, 지구촌을 전율에 빠뜨릴 초호화 축구팀들이 공격해 와야 한다
부처나 공자나 예수보다 더 환상적인 외계 스타플레이어들이 와야 한다
은하계 별들이 두두둥둥! 자웅을 가리는
우주 월드컵이 열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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