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예지의 능력이 깊어지는 밤 - 김명기

마루안 2019. 10. 9. 18:46



예지의 능력이 깊어지는 밤 - 김명기



잘 가는 치킨집과 편의점에서
치킨과 맥주를 사 들고
당신 만나러 가던 밤길을
되짚어 가지 않아도 되는 날은 온다


낡은 가죽에 덮여 곰팡이 슬어가는
눅눅한 희랍 예언서 애매한 문장처럼
오래도록 천천히 그러나 불식간에 온다


어느 날 알 수 없는 일을
예감할 수 있는 능력이 생기면
비로소 이별의 준비는 끝난다


사랑의 생존 방식은
과거형이든 진행형이든 미래형이든
늘 처참하거나 진부하다


그러므로 사랑이 끝날 때마다
우리의 예지능력은 한층 더 깊어지나니
결국 처참하고도 진부한 사랑은
이별이 새긴 예감을 따라 반드시 다시 온다


그런 날은 저문 세상으로 나가
아직 오지 않은 사랑마저 부둥켜안고
더더욱 이별을 재촉하거나
다시 올 사랑을 위해
여전히 그 밤길을 더듬더듬 걸어 올라가고 있는
당신 부질없는 마음을 돌려세우시라


잘 가라 다시 올 세상의 모든 사랑이여



*시집, 종점식당, 애지출판사








한로(寒露) - 김명기



꽃무릇 한창인 마당을
결기 없는 마음으로 내려다보는 나는
고즈넉하다


사라져가는 순간을 가만히 지켜보는 연민
그 내밀함은 착각으로부터 시작되므로
살아가는 것인지 살아지는 것인지
여전히 알 수 없다


최초부터 지금까지
모든 것은 언제나 새롭게 시작됐지만
결국 슬퍼지는 한때를 위해 기울어지는
한창이라는 말


무수한 기억의 반복이 깊어져 꽃이 되고
한 사내를 고즈넉하게 만들어버린 날
하혈하듯 허물어지는 붉은 꽃잎 속으로
어제와 다른 바람이 들고
꽃그늘마저 지는 저 자리, 이제
더욱 쓸쓸한 날들만 피겠다






# 며칠 전까지 반팔을 입었는데 이삼 일 사이에 기온이 뚝 떨어져 완연한 가을날이다. 쓸쓸함이야 늘 옆구리에 차고 다니지만 서늘한 바람이 찬 바람으로 바뀔 때 쓸쓸함은 절정에 이른다. 실패한 사랑을 간직한 사람은 더욱 그럴 것이다. 오늘부터 진짜 가을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