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가을을 사는 힘 - 김종필

마루안 2019. 10. 3. 22:20



가을을 사는 힘 - 김종필



가을이 산을 넘을 때까지
오른 적이 없는데
며칠째
늦은 밤 검은 머리칼을 감으면
단풍물이 노랗게 흘러
온몸을 적시네
나도 모르게
가을이 내 속에 온 것이지
속옷을 파고들어 사타구니가 가렵고
꽉 다문 입술을 파고들어
목구멍을 따갑게 하는
유리섬유 작업 때문은 절대 아닐 거야
쇳가루도 삼키도록
날마다 마디마다 단련된 몸인데
유리섬유는 그냥 장난이지
유리섬유가 검은 머리칼 노랗게 물들이는 동안
가을을 살았을 뿐이야


노동은 힘들지 않아
이깟 일로 그만둘 수는 없지
말 없이 떠난 가을처럼
아무 말 없이 노랗게 물들어
아무 일 없었던 것처럼 씻어 내리면 될 일
서러운 눈물을 노랗게 흘리며
야들야들한 돼지고기가 먹고 싶었던 거야
가을을 사는 힘인 거야



*김종필 시집, 쇳밥, 한티재








고등어구이 - 김종필



고등어구이 한 토막 집다가
아궁이에 불을 지피는
엄마 곁에 조잘거리는 아이가 그립다


살아가는 하루 또 하루가
늘 뜨거운 잿더미를 퍼내는 일이어서
마구 흐르는 땀을 닦느라
펑 펑 울 수도 없었다던 엄마는


아궁이 잔불에
한사코 대가리가 맛있다는 영감과
새끼들에게 겨우 한 토막씩 돌아가는 고등어를 구웠는데


석쇠를 뒤집을 때마다
새어 나오는 침을 참을 수 없고
고소한 냄새가 모깃불 연기보다 매워서
넋 놓고 울었다고


늙는 아들의 밥숟갈에
타지 않아 더 고소한 살점을 올려 주시며
울다가 웃다가 우시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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