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빛나는 그늘 - 이성배

마루안 2019. 10. 2. 22:28

 

 

빛나는 그늘 - 이성배

 

 

올봄,

낡은 연립보다 연배인 은행나무 간단하게 잘렸다.

나무 아래 평상은 치워졌고

여름내 살뜰하게 푸성귀가 자랐다.

 

3층 연립을 다 가리던 그늘이 사라졌으니

열여덟 평 눅눅한 삶에도 볕이 좀 들었겠다.

 

오랜 시간 평상을 차지했던 노인들이 어색하게

입구를 서성이다 제 집으로 들어가거나 입구에 앉아

내다버린 화초처럼 남은 물기를 말렸다.

나무 한 그루 사라진 풍경이 이렇게 빛날 줄 누가 알았을까.

 

둥지 잃은 까치만 근처 전깃줄에서 며칠 깍깍이다 떠났고

평상이 있던 자리에는 더 이상 사람들이 모이지 않았다

그늘이 너무 밝게 빛났으므로

 

 

*시집, 희망 수리 중, 고두미

 

 

 

 

 

 

평화연립 - 이성배

 

 

집집마다 그만그만한 노인들이 산다. 아주 가끔

심심한 아이가 노인 손에 이끌려 근처 슈퍼를 간다.

 

떠나면서 챙겨가지 않은 낡은 장롱들이 며칠

사람들의 관심을 받지만 대개

노인들은 연립 입구 시멘트 바닥에 앉아 열무를 다듬거나

고추 같은 오래 두고 먹을 식량을 말린다.

 

오후 세 시쯤

야트막한 깔개가 있는 노인은 깔개를 가져와 앉지만

화단 턱이나 그냥 바닥에 앉은 사람도 여럿이다.

 

오망한 것은 바닥에 구멍을 뚫으면 모두 심어 먹는 그릇이 되듯

삼십 년 넘은 평화연립도 오망하니 그늘이 든다.

그늘은, 어느 한 집 신경 써 챙겨가지 않은

평화연립의 마지막 공동재산이다.

 

 

 

 

# 이성배 시인은 1973년 충북 괴산 출생으로 충북대 국문과를 졸업했다. 1999년 경찰관이 되어 현재 음성 한 파출소에 근무하고 있는 경찰이다. <희망 수리 중>이 첫 시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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