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행운의 편지 - 김학중

마루안 2019. 10. 3. 22:09



행운의 편지 - 김학중



당신이 여행을 떠난 줄도 몰랐다
편지칼로 곱게 연 편지에는
지구에서 일어나는 기적들이 적혀 있었다
탄자니아 어느 마을 앉은뱅이가 일어나 물구나무서고
케냐의 벙어리가 말하게 된 기쁨에 수다쟁이가 되고
어느 무슬림의 마을에선
눈을 잃은 딸이 앞을 보게 된 것에 기뻐
그 곁에서 말라 죽어가던 아비가 되살아났다고
당신은 이 기적의 보고(報告) 마지막에 힘주어 써놓았다
이건 모두 사실이야


그에게 답장을 썼다
가로등을 피해 시골로 내려간 별들처럼
기적도 기적을 원하는 사람들에게로 떠났다고
이곳의 아이들은 꿈을 갖기 전에
달력을 넘기는 것이 삶임을 알고 있으며
아프지 않아도 잘 죽어가고 있는 사람들
그들의 유일한 기적은 생의 지루함인데
미안하지만 그것은 편지에 동봉하지 못했다고
편지가 가닿을지도 모르지만 답장을 썼다
평생 떠돌 그의 대지 기적의 땅으로
당신의 이름을 지우고 봉투를 밀봉해
보내는 사람과 주소도 적지 않고 빨간 우체통에 넣었다
이 편지가 전해진다면
또하나의 기적이 이 땅을 떠나는 것이네


그리고 그에게서 답장이 왔다
누군가에게 편지를 쓰는 일도 기적을 믿는 일이라고
나에게만 보낸 편지인 것처럼.



*시집, 창세, 문학동네








천적 - 김학중



폐차장에 들어선 차들은
죽음에 이르러서 자신의 천적을 알게 된다고 해요
차를 부숴본 사람들만이 아는 비밀을
살짝 알려드릴게요, 앞 유리를 부수고
보닛을 찌그러뜨릴 때쯤이면
태어나 그처럼 맞아본 적 없는 차들은
백미러를 보며 길을 그리워한대요
길이 방목해 키우던 그 시절
세상 그 어디에라도 달려갈 수 있을 것 같던 그때를
회상에 빠진 헤드라이트가 그렁거리는 순간
차의 숨통을 끊어주는 게 폐차장에서 하는 일이래요
그러면 찌그러진 차체에 천적의 무늬가 떠오른대요
길의 무늬가 소름 돋듯이 뜬대요
계기판의 주행거리가 단지
오랫동안 길에게 쫓겼다는 증거였던 거죠
질주를 충동질하는 길이
후미등을 흉내낸
빨간 신호등으로 자신을 길들여왔던 거죠
먹지도 못하는 깡통을 만들어내는 천적 따위는
천적 축에 못 낄지도 모르지요
하지만 폐차를 해본 사람은 잊지 않는대요
언제나 길은 제 위를 달릴 새 차가 필요하단 걸 말이에요


은밀한 포식을 즐기고 있는 아스팔트 도로
그 헛바닥 위로 당신도 막 걸음을 옮기고 있군요.






 # 시집 한 권에 보통 60편 정도의 시가 실린다. 필사하고 싶은 시가 많은 시집도 있지만 한 편도 눈에 들어오지가 않아 그냥 넘어가는 시집이 대부분이다. 위 두 시를 이 시집의 대표작으로 생각한다. 나만의 방식으로 꼼꼼하게 고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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