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홀수를 사랑한 시간 - 박서영

마루안 2019. 10. 2. 21:45



홀수를 사랑한 시간 - 박서영



두 귀를 덮을 털신이 필요하다고 생각한 건
당신이 떠나고 나 뒤였지


여름날의 아름다운 이야기들이 밖으로 나가거나
그 이후의 추운 이야기들이 다시 돌아오거나
아무튼 두 귀를 막아야
영혼이 미쳐도 제대로 미칠 것 같아서


어느 날에는 눈보라고 짠 복면을 쓰고
어느 날에는 눈물로 짠 허물을 걸치고
반짝이는 햇살과 흩날리는 꽃잎을 세어보기도 했지만


얼마나 열심히 잊었는지 풀들이 새파랗게 질려서 돋아난 곳
아 참, 그곳은 당신 집 앞 공원이었지


짝을 맞춰보는 것만큼 서러운 일이 없다는 걸
혼자 식당에 앉아 나무젓가락을 찢으며 깨달았지만


모르는 사내의 어깨 너머로 추억이 보일 때
너머의 너머를 사랑하다가 체념하고 돌아서는 게 달빛인가
구름인가 자욱한 눈보라인가


내 운명을 덮어주고 싶어요, 목소리의 주인은
내가 분명한데 아닌 것 같아
아닌 것 같은 한 사람이 쭈그리고 앉아 지우고 있는 시간들



*시집, 연인들은 부지런히 서로를 잊으리라, 문학동네








입술, 죽은 꽃나무 앞에서 - 박서영



더 깊이 만지기 위해 살을 파고들어가
서로의 뼈를 만지면서부터 대부분은 불행해졌다
처음엔 보여주었고 나중엔 말해주었고
천천히 부풀었다가 찢겨져 흩날려버리는 것


한 입만 하다가 두 입만 하다가 세 입만 하다가
첫 한 입을 잊어버리는 일


주고받은 말들은 산산조각났다
우리는 어디에 파묻어야 할지 모를 말을 주고받으며
종이 같은 추억을 찢어 날렸다
벼랑 위에서 구름 위에서 태양 속에서


나는 불탔다 몸서리치는 언어를 반죽하여
입안으로 밀어넣었다
아침의 모든 것들과 저녁의 모든 것들과 밤의 모든 것들이
곧 몰려올 것이기에 이 악물고 울음을 참았다


하룻밤 자고 나면 나무에 희디흰 꽃들이여 피어라
포옹을 잊지 않은 긴 팔로 너를 안아줄 테니
뼈만 남은 꽃나무 유골, 다시 사랑을 시작하라





시인의 말


죽음만이 찬란하다는 말은 수궁하지 않는다.
다만, 타인들에겐 담담한 비극이
무엇보다 비극적으로 내게 헤엄쳐왔을 때
눅음은 정교하게 들여다보는 장의사의 심정을
이해한 적 있다.


나는 사랑했고 기꺼이 죽음으로
밤물결들이 써내려갈 이야기를 남겼다.


2017년 10월 18일


*일러두기
이 책은 박서영 시인의 유고 시집이다. 시인이 출판사로 최종 원고를 보내온 날은 2017년 10월 18일이었다.




'한줄 詩' 카테고리의 다른 글

빛나는 그늘 - 이성배  (0) 2019.10.02
예고편 - 성윤석  (0) 2019.10.02
파산된 노래 - 김안  (0) 2019.10.01
빨간 점퍼를 입은 블랙아웃 - 김재홍  (0) 2019.10.01
비닐봉지 - 박소란  (0) 2019.10.0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