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파산된 노래 - 김안

마루안 2019. 10. 1. 20:01



파산된 노래 - 김안



우리를 만든 것은

불행과 슬픔이고

빛과 소음을 떠나 무능한 밤이고

무능하여 속죄가 불가능했던 밤이고

때문에 집은 달아나고 심장만 너덜너덜 자라나는 밤이고

그러기에 이 밤은

우리가 아물기도 전에

빛으로 소음으로 끝날 테지만

우리가 불행과 슬픔으로 만들어 낸 피로처럼

가까워질수록 증오하게 되던 애인들처럼

우리에게 숨어들어 밤새 속삭이던

투명한 영혼들도 불가해한

이유로 다 팔려 나가고

어떻게든 아물기 위해

차갑고 희뿌연 유리창에 갇힌 채 비루한 겁을 베끼는 밤이지만

어떻게든 아물려는 불가능한 밤이지만

아무는 밤이지만 

그것은 결국 어떻게든 간에 존재하려는 기술

빛과 소음으로 되돌아가려는 기술

고요한 전체주의

평범의 제국주의

우리는 패배하면서도 걷는 사람들이었을까

서로가 갇혀 있는 유리창 앞에 서서

우리가 기뻐했던 것은 결국

우리의 죄

전이되는, 침묵과 무위란 악

우리의 기록엔 물음이 없어서 응답도 없고

서로가 원하던 기억도 없고

읽을 책도 할 수 있는 말도 없는 밤

모두가 결백할 뿐이구나

창문 아래

잠든 가족의 머리맡에 웅크려

비굴한 괴물이 되어 가는 실증으로 아무는 밤

겁에 질린 무능한 밤을

살아 낼 말들이 내게 있을까

우리가 만든 개새끼들과

우리가 지나온 야만과 행복을 담아낼

파산된 노래가



*시집, 아무는 밤, 민음사








파산된 노래 - 김안



우리는 정직하게 말해도 되겠지만,

종국엔 비겁하게 말을 고르겠지.

누군가는 시체를 숭배하며

시체뿐인 기억을 기념하고 기록하고

누군가는 기억 속에서

스스로를 지워 나가며 투쟁하듯,

누군가는 증언 앞에서 포악하게 침묵하고,

또 누군가는

겸손해지듯,

이 말의 노역들은 이처럼 쓸모없이

지독하게 비열한 모럴과 무한한 타락 사이에서

불행한 우연들로 집적된 필연들 사이에서

단 하나의

감정을 걸러 내기를,

단 하나의

가치를 뽑아내기를 바라마지 않겠지만,

그러니 누군가는

종국엔 일상이 된 악들만이 가치가 된다고 하겠지만,

말이 우리를 비껴 나가면서 어긋나면서 가 닿는 가치가

민족중흥,

선진 대한민국,

조국의 미래 따위일 리는 없겠지만,

부끄러움은 자라나는데,

우리의 말은 아무런 괴로움 없는

스스로에게만 자명한 선들,

선의 역린.

그리하여 우리의 말이

종국엔 평범하고 고요한 무관심들이라면,

무관심의 전체주의라면,

이 노래는 어떻게 파산해야 할까,

어떻게 사라져야 할까,

기억이 사라지고

기억이 기록되지 않아 우리가 영영 사라질 때까지,

우리의 말이

우리로부터 끝끝내 항거할 때까지,

우리의 육체 속에 없던 말들과

아직 오지 않은 미래의 어휘들과

비참의 부력으로 떠서

우리 바깥에서 우리를 바라보고 있을

삶이 없는 생자(生者)들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