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비닐봉지 - 박소란

마루안 2019. 10. 1. 19:37



비닐봉지 - 박소란



알 수 없는
무엇을 생각하는지 무엇을 좋아하고 또 그리워하는지


퇴근길에 김밥 한줄을 사서
묵묵한 걸음을 걷는


묵묵한 표정을 짓는
입가에 묻은 참기름 깨소금을 가만히 혀로 쓸 때마다
알 수 없는,
참 알 수 없는 맛이다


밥을 먹을 때면 늘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오르고
어째서
그것은 죽은 사람의 얼굴인가


쉽게 구멍이 나는


버리면 된다, 이런 밤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검게 읊조리는


자정이 지난 골목을 혼자 서성이는
까닭도 없이
달리는
내처 나는, 날아보는, 제 더러운 날개를 찢어버리려는 새처럼
어디로든


언제든
도무지 썩지 않는



*시집, 한 사람의 닫힌 문, 창비








가발 - 박소란



알고 있다고 말하지 않는다 감쪽같아요,
그 순간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가발을 고쳐 쓸 때면
한쪽 입꼬리를 슬쩍 올리기도 할까 나는 불안하다
수시로 걱정스러운 얼굴이 되어 거울 앞에 선다
멀끔하게 꾸며진 신촌 뒷골목 모텔 방에서


섹스는 해도 잠은 자지 않는, 한 침대에 나란히 눕지 않는
그런 게 다 가발 때문은 아닐 것이다


내 사랑은 아무데서나 벗겨지고 또 구겨진다
우스워진다


끝내 모른 체할 수도 있을 것이다


실은 말이야,로 시작되는 어떤 대화를 기대한 적도 있었다고
나는 말하지 않는다


아무것도 바라지 않아요
삭은 깍두기 접시를 가운데 두고 함께 밥을 먹는 새벽
아, 얼마나 소박한지 부연 김이 피어오르는 두개의 뚝배기가 얼마나 따뜻한지
이런 게 진짜가 아니라면 뭐겠어요


한겨울에도 식탁 앞에 앉아 땀을 뻘뻘 흘리는
너를 보면서
국을 뜨며 고개를 숙일 때마다 조금씩 어긋나는 정수리를 훔쳐보면서


감쪽같아요 정말, 말하지 않는다
허기진 듯 쉬지 않고 숟가락을 놀리는 것이다 식어 가는 국물을 휘젓는 것이다


아무것도 말하지 않았는데 우리는
들키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왜 자꾸 힐끔거리나 뭐라고 귓속말을 주고받으며 금 간 벽처럼 웃나






# 박소란 시인은 1981년 서울에서 태어나 경남 마산에서 성장했다. 동국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고 2009년 <문학수첩>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심장에 가까운 말>. <한 사람의 닫힌 문>이 있다. 신동엽문학상, 내일의한국작가상을 받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