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반짝이는 것이 속도라면 - 현택훈

마루안 2019. 9. 30. 21:55



반짝이는 것이 속도라면 - 현택훈



깊은 곳에서 전화가 왔다
열람실 구석에 쭈그리고 앉아 연애소설을 읽고 있는 곳을 지나
이별 후에 지난 사랑을 추억하는 부분을 읽고 있는 곳을 지나
핸드폰 진동이 울려서 들어간 서가 더 깊은 곳으로 꺾어
우물처럼 깊은 내 목소리에 전화를 건 사람이 더 두려워질 때
목소리는 낯익은데 얼굴이 잘 떠오르지 않을 때
정말 오랜만에 걸려온 전화를 받으며 바라본 서가에 꽂힌 책들이 가지런한 곳을 지나
기계설계, 정밀 측정시스템 공학, 기계진동론, 기계재료학, 연소공학....
그녀의 목소리가 기계에 관한 전문 서적처럼 점점 낯설게 느껴질 때
이별도 깊은 어느 곳에서 기계처럼 돌아가고 있는 것일까
너무 멀리 온 것 같지만 그리 멀리 가지 못한 곳에서 회전하고 있었나
기기 기기긱, 깊은 곳에서 돌아가는 기계 소리가 이명처럼 들리는 곳을 지나
살아온 시간들이 기계처럼 느껴질 때
전화는 옛날처럼 끊어지고


도서관에서 나와 등나무 아래에 쭈그리고 앉아 괭이밥풀꽃을 바라볼 때
여름인데 서늘한 등줄기를 타고 흐르는



*시집, 난 아무 곳에도 가지 않아요, 걷는사람








야행관람차 - 현택훈



쌍떡잎식물과 외떡잎식물로 나누는 것보다
수분 방법에 따라 꽃을 분류하는 게 더 낫다고
발자국이 내게 말했다


몇 번째 불빛에 앉아도 너는 다시 그 자리라는 걸
이제 알 때도 되지 않았느냐고
그림자가 내게 말했다
몇 번을 더 말해야 알아듣겠느냐며
멀리서 보면 제자리에 있는 것 같지만
가까이에서는 머리가 빙빙 도는 거라고 말하는 그림자


태평양의 어느 섬에는 나무로 만든 관람차가 있다고 하지
바람으로 움직이는 관람차는 밤에도 당연히 돌아가겠지


풍매화는 풍매화끼리 모아놓으니 좋아 보이긴 하네
그러고 보니 바람이 분다고 해서 언제나 풍력발전기가 돌아가는 건 아니라는 걸
우리는 같이 봤잖아


저물녘 발자국은 아주 낮은 목소리로 말했지
윤회니 사이클이니 그런 말은 처음부터 소용없다고


저것 봐
누가 자전거를 타고 밤의 무덤가를 달리고 있어
잘 생각해봐
발명가는 그날 아침에 뭘 먹었을지


대통령 암살범처럼 적막하게 사는 것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


달팽이가 수분하는 꽃은 어느 위치에 놓을까
박쥐가 수분하는 꽃은 또 어떻게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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