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바통을 놓친 이어달리기 선수 - 서광일

마루안 2019. 9. 30. 22:56



바통을 놓친 이어달리기 선수 1 - 서광일



시간이라는 게 모양이 제각각이어서
우리는 한참 동안 멀리 있었다
제 무게를 견디지 못한 담뱃재가
탁자에 떨어졌다
글쎄 몇 번의 이별이 저런 모양이었던가
부스러기가 날렸다


고생이 뭔지도 모르고 살아온 거야 자네
적어도 말귀를 알아듣는 줄 알았는데
눈 속으로 연기가 들어갔는지
담배 목을 심하게 꺾어 눌렀다
무슨 말씀이십니까
대충 테이프로 붙여 놓은 깨진 강화유리처럼
나의 말끝은 날카로웠다
그러니까 아직 젊을 때
미친 듯이 욕심을 부려야 한다는 건지
그때서야 나는 딱딱한 의자를 밀었다
드르륵 바닥을 긁는 소리에
그는 입 모양을 만들려다 만다
내 머릿속은 한참
공사 중인 사거리에서 멈췄다


눈살을 찌푸렸다
차가 많이 막히는 모양입니다
그는 다시 담배에 불을 붙였다
학교가 파했는지 골목 여기저기서
신발 가방을 든 아이들이 깔깔대며 튀어나온다
대체 무슨 꿍꿍일까
좀처럼 다물어지지 않는 입술처럼
갑자기 우리의 간격이 우스웠다
가시죠 그만



*시집,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 파란출판








바통을 놓친 이어달리기 선수 4 - 서광일



어색한 인사를 나누거나
너를 똑바로 볼 수 있을까
똑바로 눈을 보고 말해란 말
너희들이 뱉은 예의라는 거잖아


별것 아닌 걸 갖고 사람 모질게 구네


살다 보면 더한 일이 얼마나 많은데
같이 먹고살자고 좋은 게 좋은 거잖아
너는 번지르르한 말동무들 사이에서
추억이나 씹으며 농담이나 던지고 있겠지


없는 것들은 꼭 티를 내더라 저렇게


아예 안 보고 살면 될 것 같은데
사람 노릇 하러 간 자리마다 널 만나
처음 너를 만난 곳은 학교였지
쉽게 사람을 고립시키는 방법이 모이는 곳


우리 다른 데로 가자 쟤랑 놀지 마


반나절씩 얻어터지며 다진 맷집도 소용없었지
네 얼굴을 기억하기 위해 고개를 들면
이거 재밌는데 모두 같은 표정으로 웃고 있어
언젠가 확신이 들어 멱살을 잡고 후려쳐 버렸지


저것도 자존심이라며 주먹 쥔 거 봐라


거기 선생이 서 있거나 친구 부모가 서 있거나
군대 고참이 서 있거나 사장이 서 있네
넌 잘못한 적 없지 재밌자고 한 거니까
어떻게 좋은 학교에 가고 버젓한 직장을 다니며


걱정하지 마 전화 한 통이면 다 돼


불공평이란 돈 없고 힘없는 자들의 명함이지
어색한 인사나 쓴웃음은 네 담당이 아니니까
아이들이 다른 동네 얘들과 어울릴까 봐
아파트 단지에 학교 후문에 번호키를 달면 되니까


비밀번호가 틀렸습니다


너를 만날 수 있을까






# 서광일 시인은 1973년 전북 정읍 출생으로 1994년 <전북일보>, 2000년 <중앙일보>를 통해 문단에 나왔다. <뭔가 해명해야 할 것 같은 4번 출구>가 첫 시집이다. 연극 배우로 활동하고 있는 시 잘 쓰는 시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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