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인간의 바깥 - 백무산

마루안 2019. 9. 30. 22:15



인간의 바깥 - 백무산



히틀러는 군함을 몰고 발트해를 순항하기보다
베르디와 바그너를 연주하는 걸 더 좋아했고
꽃과 자연풍경을 잘 그리는 화가였다


스딸린은 장갑차를 닮은 자신의 철갑차를 몰고
전선을 도는 일보다 어린아이들을 더 좋아했고
볼쇼이 오페라와 영화 광팬이었다


과거 이 나라 독재자는 총보다 붓을 잡는 걸 더 좋아했고
틈만 나면 붓글씨와 수채화 그리기에 몰입했다


홀로코스트 기획자들은 렘프란트에 열광했고
베토벤을 수준급으로 연주했다


이웃 동네 사는 정치 사기꾼은 물 맑고 공기 좋은 강변
고향에 돌아와 술담배도 않고 나무와 꽃을 가꾸고
음악을 즐기면서 수많은 사람들의 삶을 파탄내었다


저 맑은 물 좀 봐 저 나비 좀 봐
손에 잡힐 듯한 밤하늘 별들 좀 봐
이런 곳에 살면 마음이 저절로 맑아지겠지?
시가 저절로 나오겠지? 이 음악 좀 들어봐
저 작품 좀 봐 영혼이 다 맑아지는 느낌이야
그런 탄성 들으면 나는 몸에 소름이 돋는다


그 탄성이 끝나기도 전에 이렇게 묻는다
이건 얼마짜리지? 여긴 한평에 얼마지?
아름다운 것도 고귀한 것도 추악한 것도
구역질나는 것도 신성한 것도 꼴리는 것도 다
그 누구의 것이다 욕망의 대장에 등기가 된 것들이다
부처님도 언제부턴가 인간의 옆구리에서 탄생하고
거룩한 하느님도 인간의 갈비뼈를 뽑아 만든다
내 것이 아니므로 신성을 소유할 수 없고
내 것이므로 신성을 따를 필요가 없다
밖을 다 지우고 밖을 다 안으로 구겨넣고
밖이 증발하니 밖을 잃은 혁명은 구더기가 다 파먹었다


인간과 우주를 하나라고 해놓고 자연과 인간을 하나라고 해놓고
삶과 죽음을 하나라고 해놓고 한입에 다 털어넣었다
인류는 하나 세계는 하나 진리는 하나
하나라고 해놓고 한입에 다 털어넣었다
센 놈이 다 털어넣었다 고리대금업자가 다 털어넣었다
제국의 제후들이 다 털어넣었다
우주도 얕은 접시물에 다 털어넣었다


창을 열고 내다봐도 안방이다 대문을 열고 나가도 안마당이다
저 밝은 불을 좀 꺼다오 저 눈을 찌르는 조명 때문에
저 국경수비대 때문에 저 1퍼센트 제국의 십자군 때문에
저 세계라는 경계의 말뚝 때문에 나 때문에 나 때문에
밖을 볼 수 없다 밖을 내버려두라 침묵을 내벼려두라
고요를 내버려두라 흘러가는 것을 내버려두라
바깥은 내가 더 태어나야 할 곳이다 나의 잠재적인 신체다
내버려두라 내버려두어야 하나가 된다
저 불을 좀 꺼다오 제발
저 눈알을 후벼파는 조명을



*시집, 그 모든 가장자리, 창비








내가 계절이다 - 백무산



여름이 가고 계절이 바뀌면
숲에 사는 것들 모두 몸을 바꾼다
잎을 떨구고 털을 갈고 색깔을 새로 입힌다
새들도 개구리들도 뱀들도 모두 카멜레온이 된다
흙빛으로 가랑잎 색깔로 자신을 감춘다


나도 머리가 희어진다
나이도 천천히 묽어진다
먼지에도 숨을 수 있도록
바람에도 나를 감출 수 있도록


그러나 이것은 위장이다
내가 나를 위장할 뿐이다
나는 언제나 고요 속에 온전히 있다
봄을 기다리기 위해서도 아니다
나고 죽는 건 가죽과 빛깔이다


나는 계절 따라 생멸하지 않는다
내가 계절이다


늙지 마라
어둠도 태어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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