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그 얼마나 - 이원규

마루안 2019. 9. 23. 19:15



그 얼마나 - 이원규



병원에서 폐암말기를 선고 받아봐야
아프지 않은 날들이 그 얼마나 다행인지
지리산 어느 골짜기로 사라질까 홀로 고민하다
폐암말기가 아니라 결핵성 늑막염
아홉 달만 약 먹으면 살 수 있다는 말을 들어봐야
치료가능한 병은 병도 아니라는 것을 절감하고
댓글 하나로 선거법 위반 고소를 당해봐야
법 없이 살아온 날들이 그 얼마나 한심했는지
벌금을 내고 전과자가 되거나
문인간첩 기자간첩단으로 엮일 뻔해봐야
옥사하거나 무기징역 사형선고를 받은
독립투사 민주열사들의 어금니를 겨우 알게 되고
먼저 죽은 친구의 문상을 가봐야
아직 살아남은 날들이 그 얼마나 복에 겨운지
언제나 행복의 바탕화면은 불행이지만
눈보라 속에 핀 복수초 꽃을 직접 봐야
군불 지피는 저녁이 그 얼마나 눈물겨운지



*시집, 그대 불면의 눈꺼풀이여, 도서출판 역락








지리산 팔베개 - 이원규



그런 날이 있었다
심심산중에서 길을 잃어도
산비탈에 구르고 벼랑의 나뭇가지 부러져도
도무지 죽지 않을 것 같은 그런 날이 있었다
칡덤불 다래덤불이 내 몸을 받아주고
바위 솔이끼가 푸른 요를 깔고
신갈나무 가지들이 두 손을 내밀어
반달곰의 신혼방 같은 석실로 안내하던
죽어도 죽을 수 없는 그런 저녁이 있었다


이따금 생의 패가 풀리지 않아
꺼억꺽 목울대를 조르다 잠이 들면
노고단 마고할미가 유장한 능선의 왼팔을 내밀어
스리슬쩍 팔베개를 해주던 그런 밤이 있었다
푹신한 낙엽요를 깔고 함박눈 이불을
눈썹까지 끌어올리던 지리산 화개동천의 새벽
팔베개는 지상의 가장 아름다운 선물이었다


그리하여 나 또한 마구 뛰는 심장을 맷돌로 누르고
저린 팔 그대로 코끝에 침을 바르며
단 하룻밤만이라도 당신의 곤한 잠을 지켜주고 싶었다






# 유난히 더위를 타는 체질이라 여름이 떠날 채비를 하는 틈을 이용해 득달같이 지리산으로 달려갔다. 언제나 어머니처럼 안아 주는 지리산의 2박 3일은 살아 있음이 얼마나 행복한 것인지를 깨닫게 해주었다. 이런 시를 읽는 것 또한 그 얼마나 행복한 일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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