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난 아직도 네가 좋아 - 정다운

마루안 2019. 9. 23. 19:25



난 아직도 네가 좋아 - 정다운



2호선을 타려 해
하루 종일 서울의 지하를 돌면서 앉아 있으려 해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돌아가고 싶어서
걱정 마. 늦은 적 없잖아.


개를 키우려 해
꼬리를 흔들다가 분홍 잇몸을 펼치며 물려고 하고
그 좋다던 간식도 엎어 버리고 씨발거리는 개를
연하고 귀여웠던 새끼의 시절을 잊을 수가 없어서


얼음 언 호수 위를 기어가려 해
바작바작. 소리가 날 때마다 무섭고 서러워서
눈물이 난다? 근데 어른이니까 아닌 척하는 거야
다들 그래 죽고 사는 일 아니라면 괜찮은 거라고
물에 좀 빠지면 어때
춥고 우리가 조금 멀어지기밖에 더 하겠어


사춘기의 아들을 둔 거와 같아
너를 이해하기 위해 너와 마주치지 않아야 하지
너는 왜 너더러 좋은 사람이 되길 요구하냐지만
아니야 네 인생 네 거란 걸 알고 있어 나빠져도 돼
건방져도 돼 하지만 가끔은
네가 나를 좋아해 주면 좋겠어 예전엔 그랬었잖아
내 냄새를 들이키고 얼굴을 만지작거리고
나 없음 울었잖아 밥보다 수박보다 레고보다 좋았잖아
이제는 정말 안 되니 내가 너무 늙고 재미없니
난 아직도 네가 좋아. 정말이야.



*시집, 파헤치기 쉬운 삶, 파란출판








꼬치꼬치 - 정다운



지하철역 계단 입구에서 김밥을 팔던 아저씨는
남은 몇 줄을 챙겨서 일어납니다
아 허리 씨벌, 하지만 부드러운 남잡니다
포장마차 안에서 떡볶이를 휘젓던 아줌마는
아저씨가 들어오자 자리에 앉아 못다 먹은 비지찌개를
퍼먹습니다 다리를 벌린 채 쩝쩝거리고 있지만
고상한 여잡니다 빈속에 우아하기 힘들죠
아저씨는 어욱을 솜씨 좋게 비틀어 뀁니다
통통하고 야들야들한 이 집 꽈배기 어묵이 좋아서 옵니다
손은 습진 걸려 누더기 같지, 손님은 자꾸 떨어져,
애들은 철도 없이 유학을 가겠다 그러고,
친정엄마 지난달에 가셔서 이제 누가 내 맘을 알아줄거야,
아이고, 이러고 사는데 밥도 제때 못 먹어, 아줌마가 말합니다
눈 붉힐 일 없는 적당한 사연이라 좋습니다
젊은 사람이 복권을 또 샀어? 그쪽이 직장이 없어 집이 없어
자식새끼가 없어, 나 같으면 불만도 없겠어,
불만이 아니라 불안이라고 말했지만 안 들어 주십니다
정규직 아니고 집은 은행 거고 우울증이 있다고 말하면
목 디스크라 팔 한쪽에 마비가 오고
그 손으로 아픈 아이를 간호 중이라고 말하면
오바일까요
사실 그냥 일하고 먹고 잤을 뿐
사는 게 구체적이지가 못해 미안합니다
죽을 일도 없는데 죽상 말라며
아줌마는 죽은 게 한 마리를 손질합니다
나는 인상을 많이 쓰고 살지만
내세울 것 없는 고민일지도 모르죠
그렇다면 그냥 잘사는 척해도 될까요
저 게의 죽기 전 삶은 어땠을까요
딱했을까요 아니라면 다행인가요
딱딱했을까요 실은 물컹한 속사정이 있었다면요
우리 사이엔 오해가 있군요
말 안 한 것까지 위로할 순 없죠
게가 퐁당, 국물 맛은 나겠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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