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코스모스 뿌리께에 꽃 피던 날 - 고찬규

마루안 2019. 9. 22. 19:50



코스모스 뿌리께에 꽃 피던 날 - 고찬규



푹 삭은 젓갈로 한 끼를 해결하고
마루에 걸터앚아 배를 두드리네
충분히 그럴 수 있는 일이나
여전히 기분만은 묘해지네
줄 맞지 않아 뽑아 던진 코스모스가
시궁창에 거꾸로 처박힌 채
꽃 피었으니,
이건 그야말로 꽃이 그냥 핀 게 아니라
꽃을 피운 거라고 봐야겠네
누가?


코스모스의 내력을 찾아
꽃 핀 우주를 헤매네
이제 내가 할 일은
꽃을 노래하기보다는 하루라도
꽃 피우는 시궁창에 머리를 처박는 것
비로소 세상의 시궁창에 온몸을 담그는 것


푹 삭은 젓갈처럼 그리하여
한 끼쯤 밥맛나게 하는 것
오오, 배불러 머리만 핑핑 돌아가는
이 밥맛!



*시집, 숲을 떠메고 간 새들의 푸른 어깨, 문학동네








길 안의 둥지 - 고찬규



저마다 사연 있는 놈들이 모여 
꽃과 향기와 거시기를 굴뚝도 없이
노을 혹은 거짓말처럼 피워올리는
겨울 천변 공사판
드럼통에 갇혀 몸부림치는
그을음과 언뜻언뜻 하늘로 차오르는
초저녁 불꽃을 보다보면
이곳까지 와 닿은 발길과
짝 맞지 않는 목장갑, 간혹
구색에 맞춰 뒤로 돌아선 엉덩짝이
다 내 것이요 네 것이다
이럴 때면 흔해빠진 골목길
그 따뜻한 불빛을 생각한다
타오르며 사그라지는 것들의 고단함
가까이 다가가면 꺾어져 이어지는
골목과 동그란 아랫목
이를테면 애호박 하나 달고 저물어가는
노오란 호박꽃의 한 생을
떠올리는 것이다 모처럼
겨울 앞에 서 있는 겁 없음이
하루를 살아 온 자의
귀갓길 안에 놓여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