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줄 詩

인연을 자르다 - 이진우

마루안 2019. 9. 19. 22:59



인연을 자르다 - 이진우



행복하지 않았던 한 여인의 운명을 닮아
억센 잔디를 깎는다
봉분 위에 비스듬히 난 아카시아 줄기를 쳐 낸다
퍼런 낫질에 그냥 주저앉은 모습이
비뚤어진 묘비 그대로다


여인은 목관 속에서 나이를 거꾸로 먹는다


미련 때문에 무성해진 여인의 긴 머리채를
휘어잡고 싹둑 잘라 버린다
아무리 잘라내도
걷어붙인 팔을 거멓게 풀물까지 들이며
악착같이 솟아나는 건
땅 속에서 휘젓는 여인의 한이다
아무리 베어도 퍼렇게 살아 눈 뜬
여인의 연대기다


살아남은 자들의 행복을 위해서
치렁거리는 인연은 땅 속으로 빨아들이고
다시는 드러내지 말아 달라고
청청한 하늘빛 따가운 오후에
벌초한다


인연을 잘라 버린다



*시집, 내 마음의 오후, 천년의시작








멍청한 복사기 - 이진우



아버지와 어머니가 겹쳐 나를 복사했다
나는 그렇게 태어났다


나는 해상도 떨어지는 복사기
아내를 덮쳐
아이 둘울 만들었다
나를 닮지 않아 더욱 반가운 놈들
가끔은 실수가 완벽을 앞선다


내가 알지 못하던 방식으로
아이들이 멋대로 확대 복사 되는 걸 보면서
나는 입을 다물지 못한다
저건 아닌데
저러다간 폐기처분 당하는 거 아닌지
걱정만 수없이 복사된다
내 말을 듣지 않는 아이들
안기고 뽀뽀하면 모든 게 해결되는 아이 둘에게
나는 아버지도 못 되고 어머니도 못 된다
그저 성능 떨어지는 복사기


어디 복사가 능사랴만
한 번도 선명하게 나조차 복사하지 못했다
내 제품번호조차도






# 이진우 시인은 1965년 경남 통영 출생으로 고려대 철학과를 졸업했다. 1989년 <현대시학>으로 등단했다. 시집으로 <슬픈 바퀴벌레 일가>. <내 마음의 오후>, <보통 씨의 특권>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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